지난해 3월 카드회사 부실 문제가 표면에 떠오르자 채권 시장에서는 카드회사들이 발행한 회사채 거래가 전면 중단됐다. 채권자는 채권시장에 발이 묶였지만 주주들은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팔아 위험을 피했다. 시장이 작동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운명이 갈린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이런 일이 없다. ‘땡 처리 시장’으로 불리는 부실채권 시장이 있어서 아무리 부실한 채권이라도 부도만 안 났다면 싼 값에 거래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부실채권 시장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원인은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에게 있다. 공급자인 금융회사들은 부실을 공개하기 싫어한다. 주가가 떨어지고 고객이 도망갈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수요자인 기관투자가도 많지 않다. 채권의 부실 정도와 위험을 파악하고 정확하게 값을 매길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일부 금융 전문가들은 400만명에 육박한 신용불량자들의 부실채권 처리 문제도 시장을 육성해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실채권도 채권 나름이다. 채무자가 왜 빚을 졌고, 왜 갚지 못하고, 얼마나 갚을 수 있을지에 따라 값이 천차만별이다. 시장이 옥석을 고르고 값을 매겨주면 좀 더 효율적인 처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배드뱅크는 부실채권 시장 조성자로서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10일 정부가 발표한 신용불량자 대책은 이런 기대와 거리가 있다. 정부는 당장 신용불량자 수를 줄이는 데 급급한 나머지 배드뱅크에 부실채권 시장을 조성하고 육성할 임무를 부여하지 않았다. 대신 획일적인 기준으로 부실채권을 신속하게 떠안고 신용불량자들에게 장기 저리의 대환대출을 해주는 거대한 부실은행이 탄생하게 됐다는 것.
이에 대해 금융계 관계자는 “채권자와 채무자가 시장에서 해결할 일에 정부가 끼어들면서 거대한 모럴해저드가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용불량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려면 땜질식 처방보다는 부실채권 시장을 조성하고 육성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