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 국경조약은 ‘유령 조약’
취재 과정에서 만난 중국 학자들은 엄연히 존재하는 국계비를 들이대도 “중앙정부가 공식화하지 않는 한 1962년 조약은 설(說)일 뿐”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북한 당국이 매년 발행하는 ‘조선중앙연감’에서도 이 조약에 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북-중 국경조약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 것은 조약 체결에 관여했던 사람들의 기록이 하나둘씩 공개되면서부터. 1990년대 중반 중국에서 출간된 천이(陳毅)의 연보(年譜)엔 ‘1962년 10월 12일 천이 외교부장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수행해 평양에 가서 국경협정을 체결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2000년 10월엔 ‘중화인민공화국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변계조약(中華人民共和國和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邊界條約)’이라는 이름의 조약 원문과 의정서 등이 발굴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양국 정부는 이에 대해서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약을 서두른 것은 중국
드러난 사실을 종합하면 국경조약을 서두른 것은 중국이었다. 1959년 이래 인도와 무력충돌을 빚어온 중국은 잠재적인 화약고인 북한 및 몽골과의 국경문제를 해결해 북방의 불씨를 없애려 했다. 중소(中蘇) 분쟁이 결정적 촉매제가 됐다.
중소 양국과 등거리를 유지하며 실리를 취하던 북한은 1960년대 들어 급격히 중국 쪽으로 기울었다.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제1서기의 개인숭배 비판은 중국은 물론 북한도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1962년 10월 소련이 쿠바에 배치했던 대미(對美) 요격용 미사일을 철수하는 이른바 ‘쿠바 위기’ 때 중국과 북한은 소련의 결정이 “제국주의에 대한 일종의 투항”이라며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저우 총리와 천 부장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이어 1963년 9월 중국의 류사오치(劉少奇) 주석이 평양을 방문해 ‘백두산 꼭대기부터 한반도 남반부까지’를 북한 영토로 재확인했다.
●깨진 蜜月, 국경의 총격전
문서상으로는 1964년 3월 중국의 천 부장과 북한의 박성철(朴成哲) 외무상이 베이징(北京)에서 ‘중조변계의정서’에 사인함으로써 압록강-백두산-두만강을 잇는 현재의 국경선이 그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65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다시 북-중간 긴장을 고조시켰다. 홍위병들이 김일성을 “비곗덩어리 수정주의자, 흐루시초프의 앞잡이”라고 비판하는 상황에서 양국의 밀월이 지속될 수는 없었다.
격분한 북한은 1967년 평양 주재 중국대사를 추방하고 주중대사를 소환했다. 이 시기 국경마을의 주민들은 북-중 양국이 상대를 헐뜯는 확성기 소리에 밤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다. 1968년 12월과 1969년 3월에는 국경선에서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인도의 한 신문은 1965년 7월 북한 외교관의 말을 인용해 “중국은 6·25전쟁 참전 대가로 백두산 지역 250km²가량을 떼어달라고 북한에 요구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1969년 김일성의 백두산 등정은 이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이벤트였다.
●백두산 분할은 참전 대가?
1962년의 국경조약 자체가 중국의 6·25 참전 대가로 북한이 양보한 것이라는 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나 이를 확증해 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북한 관계자들의 비공식적인 얘기로 미뤄 짐작할 수밖에 없다.
1984년 한국에 수해 구제 물자를 가져온 북한적십자회 간부는 “백두산은 우리와 중국이 반씩 나눠 관장하고 있는데, 중국에 절반을 할양한 것은 전적으로 김일성 주석의 용단이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듬해 인도네시아 반둥회의에 참석한 북한의 손성필 대표는 한국 대표에게 “백두산의 반은 조상들의 잘못으로 중국에 빼앗겼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중국 학자들의 견해는 달랐다. “1962년 국경협상에서 중국이 파격적인 양보를 해 당시 대만 정부가 중국을 공격하는 빌미가 됐다”는 것. 이 같은 주장은 문화대혁명 때 지린(吉林)성의 옌볜(延邊) 조선족 자치주 주장이었던 주덕해(朱德海)가 숙청되면서 나오기 시작했다. 주덕해는 홍위병들에게 ‘영토를 북한에 떼어준 (조선)민족분자’로 비판받았다.
현지의 조선족들은 “문화대혁명 때 베이징에는 북-중 국경조약의 최고책임자인 저우 총리를 매국노로 공격하는 대자보도 나붙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중국 양보설은 왜 나오나
중국측의 파격 양보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1712년 조선과 청나라가 합의해 백두산정계비를 세웠을 때 백두산과 천지에 대한 논의는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중국 땅에 속하지만 1962년 조약에서 이를 무시하고 백두산과 천지 일부를 북한에 할양했다는 것이다.
조선족 학자 G씨는 “협상 당시 김일성 주석이 ‘조선(북한)의 국장(國章)에 백두산 천지가 들어가는데, 천지를 중국에 다 넘겨주면 국장을 바꿔야 한다’며 중국 대표를 설득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둘째, 중국이 두만강의 원류로 북한측이 제시한 홍토수(紅土水)를 받아들였다는 것. 1962년 국계비 설치에 참여했다는 조선족 학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협상과정에서 중국이 처음 두만강의 원류로 제시한 건 석을수(石乙水)였어요. 1909년 일본과 청나라가 체결한 간도협약을 그대로 계승한다는 거였죠. 그런데 북한이 이에 맞서 최상류인 홍토수를 경계로 하자고 나선 겁니다. 중국은 수정안으로 석을수보다 상류의 홍단수(紅丹水)를 제시했지만 북한측이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은 북한 요구대로 관철됐지요.”
두만강 발원지 인근에 설치된 국계비 21호와 20호는 바로 홍토수와 관련이 있다. 국경선은 이 발원지로부터 직선으로 그어져 천지를 가른다. 중국 학자들은 “국경선을 홍토수로 정한 것만 해도 문제인데, 자연적인 산맥의 흐름을 따라 분할하지 않고 직선으로 국경을 정한 것은 명백한 중국의 양보”라고 주장했다.
●밀약은 언제 공개될까
왜 북-중 양국은 국경조약 체결 사실 자체를 숨기는 것일까. 국내의 국제법 전문가들은 “조약 체결 사실이 알려져 한국 정부가 반발이라도 하고 나선다면 분쟁지역이 될 수 있으니 북한과 중국으로서는 일단 덮어두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또한 북한 연구자들은 “김일성이 ‘혁명 성지(聖地)’로 강조해 온 백두산과 천지를 중국과 나눠 가졌다고 인민에게 공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풀이한다. 북-중 밀약은 과연 국제사회에서도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을까.
백두산=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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