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23>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4년 4월 11일 18시 57분


20萬을 산 채 묻고 ⑤

전투에서는 한번도 진 적이 없어 전신(戰神)으로 우러름을 받기까지 한 항우가 천하를 다투는 싸움에서 끝내 지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로 풀이된다. 그런데 그중에서 뒷사람들이 반드시 손꼽는 실책 중에 하나가 항복한 진나라 군사 20만을 산 채로 땅에 묻은 일이다.

역사의 패자(敗者)로서 달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평가겠지만, 그 일은 흔히 항우의 개인적인 악성이나 우매함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그 시대의 사고를 제약할 수밖에 없는 선례(先例)들을 조금만 들춰보면 반드시 그렇게 볼 수만도 없을 듯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전국(戰國)시대만 해도 갱(@)이라는 생매장은 포로를 처리하는 수단으로 자주 쓰였다. 병가(兵家)로 분류될 만큼 병법(兵法)으로 이름난 장수들도 그랬는데, 특히 항우가 맞서 싸운 진나라의 장수들이 더했다.

그 한 예로 진 소왕(昭王) 때의 장수 백기(白起)는 항복한 조(趙)나라 군사 40만을 산 채로 땅에 묻었으며 또한 항복한 삼진(三晋)의 군사 13만을 목 베어 죽인 적도 있다. 포로를 수용할 시설도 없고, 그들을 먹여 살릴 식량이나 관리할 병력도 넉넉하지 않은 적지에서의 야전(野戰)에서, 당시의 장수들이 고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포로 처리 방식이 생매장이라는 집단학살이었는지도 모른다.

항우는 타고난 전투에서의 맹장이요, 그때는 한창 효율성과 결과를 중시하는 병가의 사고로 굳어 있을 때였다. 한편일 때는 미천한 졸오(卒伍)의 사소한 불편까지도 정성껏 보살펴 주지만, 한번 적이라고 규정되면 그 생명조차도 아무런 의미 없는 현상으로 여길 만큼 비정해져야 하는 게 그 시절의 장수된 자가 갖추어야 할 품성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항우를 끝내 변명해 줄 수 없는 것은 그 시절에도 그와 같은 집단학살이 정당화되지는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뒷날 소왕에게서 억울하게 자결을 강요받게 된 백기도 자신의 죄를 항복한 조나라 군사 40만을 땅에 묻어 죽인 일을 들며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다. 따라서 항우가 항복한 진졸 20만을 땅에 묻어 죽인 일은 그만의 특유한 악성이나 우매함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천하를 다스릴 자의 덕성과 먼 것만은 분명하다.

경포(경布)의 끔찍한 최후를 두고 벌어지는 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경포가 모반을 일으켰다가 자향(玆鄕)의 농가에서 목을 잃게 되는 원인을 두고 뒷사람들은 흔히 두 가지 죄를 든다. 하나는 항우가 시킨다 하여 의제(義帝)를 죽인 일이요, 다른 하나는 바로 신안에서 항우를 도와 20만 항졸(降卒)을 산 채로 땅에 묻은 일이다. 우두머리가 따로 있는데도 그를 비난하는 것은 그만큼 그가 그 일에 주동적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살아있는 목숨을 20만이나 땅에 묻은 일에 대해 비난받아야 할 사람들 중에는 그날 밤의 논의에 끼지 않은 이도 있다. 이를테면 항우군의 군사(軍師)로 있던 범증(范增)이 그러하다. 그때 낭중(郎中)이었던 한신(韓信)은 아직도 무겁게 쓰이기를 바라며 항우의 군막 주변을 맴돌고 있었는데, 항우와 경포의 논의를 엿듣고는 바로 범증을 찾아갔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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