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말을 3년 전 ‘친구’의 투자자인 김동주씨(현 쇼이스트 대표)에게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사석에서 ‘친구’로 성공하기까지 겪은 고생담을 들려주며 “영화제작에 뛰어든 대기업이 망하는 것도 봤고 숱한 사람들이 사라져가는 걸 지켜봐 왔다. 언저리에서 끈질기게 버티면 언젠가 기회가 온다”는 말끝에 종지부를 찍듯 날린 코멘트였다.
그땐 ‘술자리 재담’ 정도로 들었는데 영화 대사에도 쓰이다니…. 아니나 다를까, ‘황산벌’ 시나리오를 쓴 타이거 픽처스 조철현 대표에게 출처를 물었더니 “오래전부터 김동주씨와 이준익 감독이 술자리에서 자주 했던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똑같은 대사가 5년 전 송능한 감독의 영화 ‘세기말’(비디오·새한)에도 나온다. 송 감독이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잠수’ 중이라 출처를 확인해볼 길은 없으나 아마 그도 영화인들이 술자리에서 자주 했던 말을 기억해내 대사로 쓰지 않았을까 싶다.
재미있는 점은, 똑같은 대사라도 각각의 영화에서 갖는 뉘앙스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황산벌’에서 이 대사는 조카로부터 “계백이 무서워 싸움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냐”는 질책을 받은 김유신 장군이 “지금은 계백이 강하지만 계속 강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기회를 기다리며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며 자신의 전략적 선택을 설명하는 말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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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세기말’에서는 천민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졸부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늘고 길게’ 살아남은 자신의 인생을 변명하는 치졸한 자기합리화로 내뱉은 대사다.
같은 대사도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리듯, 기회를 기다리며 끈질기게 버티는 것과 비루하게 살아남는 것이 사실은 ‘한 끗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현실에서 심심찮게 본다.
독일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2차 세계대전 중에 쓴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친구들은 그를 두고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고 말하지만 그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을 수치스러워했고 스스로는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오래 살아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산문 ‘코이너씨의 이야기’에서 ‘폭력을 이기는 길은 폭력보다 오래 살아남는 길’이라고 썼다. 이런 그의 인생관은 친구들의 말과는 달리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쪽에 훨씬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스스로를 성찰하는 자의식을 꺼두지 않았던 그도 말년에 동독의 폭압적인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탈린을 찬양하는 시까지 쓰기에 이른 것을 보면 비감해진다. …그의 의식이 그를 속였던 걸까.
‘한 끗’에 불과한 그 경계는 각자가 처한 삶의 맥락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느 쪽이 옳다고 단언할 수 없다. 다만 헬렌 니어링이 일생의 경구로 삼은 폴 발레리의 말을 되새겨 볼 뿐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아라. 그렇지 않다간 나중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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