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휴대전화 노트북PC용 배터리에 들어가는 2차전지 양산에 성공한 LG화학은 전지 재료인 코발트와 흑연의 가격이 오를 때마다 고민에 빠진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전지 소재는 최근 물량 부족으로 지난해에 비해 가격이 최고 3배 올랐다.
하지만 2차전지 사업에 뛰어든 외국 업체가 최근 부쩍 늘면서 국제 전지 가격은 계속 떨어져 수출 주문량이 많아도 채산성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지 소재의 국산화율은 20% 수준이다. 따라서 국내 제조업체가 외적인 성장과 투자에 걸맞은 수익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현장 실무자들은 말한다.
▽외형만 국산=첨단 제품에 들어가는 부품이나 장비에 대한 해외 의존도가 높다는 얘기는 오래 전부터 나온 얘기다. 그러나 이 문제가 해소될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최근에는 휴대전화 액정표시장치(LCD) 디지털카메라 등 고가 첨단제품 수출이 증가하면서 일본 미국 등에서 수입하는 첨단 부품과 소재도 늘어 이 부문 적자규모가 커지고 있다.
13일 오후 경기 의왕시 A사 직원들은 일본 산요에서 수입한 전지에 플라스틱을 씌워 휴대전화나 노트북PC용 배터리를 만들고 있었다.
이 회사가 만든 완제품은 ‘MADE IN KOREA’라는 글자가 찍혀 국내 업체에 납품되거나 외국으로 역수출된다.
이 회사 연구소 이모 연구원(37)은 “전체 부품 가운데 산요에서 들여오는 물량이 30%이지만 완제품을 수출할 경우 국산으로 신고하기 때문에 수출 통계도 그렇게 잡힐 것”이라고 말했다.
직원들은 “부품 국산화율이 낮아 외국 회사가 부품 시장을 독식하는 사례를 주변에서 흔하게 본다”며 “LG화학과 삼성SDI가 만든 부품을 일부 쓰는 우리 회사는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귀띔했다.
실제로 휴대전화 LCD 가전제품 등 주요 수출품을 뜯어보면 껍데기만 한국산이지 부품과 소재는 대부분 일본이나 미국 등 선진국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1988년부터 무역 흑자 효자품목으로 불리던 반도체는 고화질(HD) TV 등에 들어가는 시스템온칩(SoC) 등의 수입이 늘면서 2001년 5월부터 적자를 내고 있다.
반도체 제조에 쓰이는 감광액의 국산화율은 30.3%이다. 또 비(非)메모리 칩의 90% 이상은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휴대전화 부품의 경우 최신 기종일수록 일본에서 수입하는 비중이 높다. 휴대전화 부품의 국산화율은 2001년 70%대에서 2002년 말 68.4%로 떨어졌다.
주요 수출품인 LCD의 액정 재료 국산화율은 10%에 불과하며 디지털카메라 핵심 부품도 대부분 수입된다.
지난해 대일(對日) 무역 적자가 185억8000만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경신한 것도 부품 및 장비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외제 일색인 첨단 장비=12일 오후 경기 평택시 장당동 에스앤티(SNT) 1층 연구소. LCD를 만들 때 장비 주변에 설치되는 2.4m짜리 대형 세라믹를 놓고 품질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 회사 이재정(李在丁) 상무는 “반도체 장비 소모품으로 사용되는 세라믹도 국내 업체가 만들지 못해 전량 수입에 의존하다 최근에야 국산화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이런 세라믹은 주로 일본 회사들이 수출한다. 국내 LCD 제조업체의 수입 의존도는 90%로 추산된다.
“기술 종속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반도체 장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카메라 반도체 2차전지 등 첨단 제품을 만드는 공장에는 국산 장비가 거의 없다고 봐도 됩니다.”
반도체산업협회가 지난해 국내 업체의 구입 장비를 조사한 결과 수입액은 28억6000만달러였다. 올해 예상 장비 수입액은 36억8000만달러로 수입 비중이 77%에 이를 전망이다.
장비도 부품과 마찬가지로 고가 첨단제품일수록 수입 비중이 높아 무역 역조의 골을 깊게 한다.
지난해 수입 품목 가운데 첨단 공정에 쓰이는 정밀기계는 전년도에 비해 60.9% 늘었다. 일제 기계류의 한국 수입시장 점유율은 40%를 넘어 대일 무역적자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반도체 검사용 장비도 최근 수입이 급격히 늘고 있어 국산화율은 지난해 29%에서 올해 26%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언오(李彦五) 정책연구센터장(전무)은 “한국 산업이 잘못 하면 목이 묶여 고기를 잡더라도 넘기지 못하고 고스란히 어부에게 바치는 가마우지와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위용기자 viyonz@donga.com
▼전문가 의견
“단발성 지원 도움안돼… 10년이상 장기플랜 마련을”
전문가들은 산업의 부가가치가 하드웨어 중심에서 부품 및 서비스로 옮겨가는 만큼 부품 및 장비 산업에 대한 획기적인 육성책 마련과 함께 대수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G경제연구원 강선구(姜善求) 연구위원은 “총선 공약과 같은 단발성 정책과 백화점식 지원 대책은 해외 의존도가 높은 부품 분야를 키우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10년 이상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을 만들어 산업 현장에 수조원대에 이르는 대규모 투자를 하지 않으면 효과도 늦게 나타나고 세계 일류 업체의 기술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메모리 반도체와 초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LCD) 생산 세계 1위라는 지위가 부품과 장비를 수출하는 나라만 배불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한국부품소재투자기관협의회 문병길(文炳吉) 사무국장은 “부품과 소재, 장비 산업이 세계 50위권 이하에 머무는 현실에서는 고가 부품과 장비로 만든 첨단제품 수출은 본전도 건지지 못하는 장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문 국장은 “국내 투자자는 단기간에 이익을 회수할 수 있는 반도체 장비에 들어가는 소모품 등에 대해 눈독을 들인다”며 “정부가 나서 장기적으로 산업의 인프라를 확충해야 국내 기업이 성장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국내 기업이 부품과 소재, 장비 산업의 핵심 기술을 확보하고 이 분야를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 이부호(李富浩) 부회장은 “최근 비핵심 부품들의 부가 가치가 급속히 떨어지자 세계 1,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전자제품 부품회사가 핵심 부품 위주로 사업 부문을 정리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이 분야의 국산화를 서두르며 민첩하게 대응하고 있다.
LG화학은 지난해 2차전지 생산공정 가운데 충·방전 부문의 장비 대부분을 국산으로 교체했다.
LG화학 송성엽 오창공장 생산기술팀 부장은 “국내 벤처기업을 육성해 리튬코발트옥사이드 등 전지에 들어가는 소재를 국내에서 공급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이닉스반도체는 장비 국산화율을 올해 30%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정위용기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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