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궁궐을 바라보면서 패공 유방은 오래 잊고 있었던 옛일을 떠올려 보았다. 20여 년 전 한 역도(役徒)로 끌려와 모질고 고단하게 부림을 당할 때였다. 하루는 시황제의 행차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 위엄과 영화에 감탄한 패공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대장부란 마땅히 저래야 하는데!”
그런데 이제 자신은 진나라의 항복을 받아낸 장수로서 그 시황제가 거처하던 궁궐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번쾌야, 너는 우리가 이곳 함양으로 끌려와 일하던 때를 기억하느냐?”
패공이 곁에 있는 번쾌에게 불쑥 물었다. 옛적 패공이 함양에 끌려왔을 때 노관도 번쾌와 함께 패공을 따라와서 일했다. 그러나 재물을 밝히는 노관은 다른 장수들과 성안 부호들의 재물 창고를 털러 가고 없었다. 장수로는 번쾌만 큰 칼을 차고 패공을 지키며 남아있었다.
패공이 오대부(五大夫)란 작위나 현성군(賢成君)이란 봉호를 두고 굳이 번쾌의 이름을 부른 것은 그만큼 감회에 젖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번쾌의 대꾸는 무덤덤하기만 했다.
“제가 아무리 미욱하지만 그때 일을 모두 잊기야 했겠습니까?”
그러면서 멀뚱히 패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딘 듯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번쾌의 말투가 패공을 지나친 감회에서 끌어냈다.
“그렇다면 그때 내가 탄식하던 말도 기억하겠구나.”
입으로는 그렇게 옛일을 되씹고 있어도, 눈은 이미 번쾌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이번에는 번쾌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감회가 어렸다.
“기억하지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돌아온 거 아닙니까?”
그런 번쾌의 말에 패공은 찬 바람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왔다? 그럼 너는 정말로 그때 내가 그렇게 되려 한다고 믿었느냐?”
“그래서 한평생 형님을 따라 다니지 않았습니까?”
“관동(關東)에는 초(楚) 제(齊) 조(趙) 연(燕) 한(韓) 위(衛) 여섯 왕이 다시 서고, 그밖에도 사해팔방(四海八方)에 숱한 호걸들이 군사를 일으켜 땅을 나누고 있다. 거기다가 장함의 30만 대군을 결딴낸 항우가 다시 50만 대군을 이끌고 이리로 오고 있는데 이곳에 이를 즈음이면 백만도 넘을 것이다. 왕공(王公)의 후예도 못되는 터에, 이리저리 긁어모은 잡병조차 10만을 채우지 못한 내가 무슨 수로 그들을 제치고 시황제가 누리던 것을 감히 넘볼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번쾌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원래로 돌아가 씩씩하게 받았다.
“그러니 그들보다 몇 배는 더 삼가고 애 써야지요”
그런 번쾌의 말투에는 단순한 믿음을 넘어 정히 안 되면 그렇게 되게 하리라는 결연한 의지같은 것까지 엿보였다.
패공과 유방이 그렇게 주고받는 사이 먼저 간 군사들이 궁궐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패공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보니 위령(衛令)이니 복야(僕射)니 낭중(郎中)이니 하는 벼슬아치들은 다 어디로 달아났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늙고 힘없는 병졸 몇이 남아 궁문을 지키다가 패공의 군사들에게 한곳으로 밀려나 눈을 흘금거리고 있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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