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노블리안스]박용/‘조세 피난처’에 기반 둔 헤지펀드 실상

  • 입력 2004년 5월 9일 17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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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뮤다, 케이맨제도, 말레이시아 라부안, 버진아일랜드….’

눈치 빠르신 분들은 짐작을 하셨겠지만 세계적인 ‘조세 피난처’로 꼽히는 곳들입니다. 법인세나 개인 소득세가 없거나 극히 적고 외국환 관리에 대한 규제가 약해 세금을 피할 목적으로 세워진 ‘페이퍼 컴퍼니’의 온상이죠.

최근 외환위기 직전 라부안과 버뮤다를 다녀온 증권사의 한 고위 간부가 들려준 이야기. 이분은 라부안에서 직원 10명 남짓한 작은 신탁회사(페이퍼 컴퍼니를 관리해 주는 회사)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화장실에 휴지조차 없는 이 작은 회사 사무실에는 서류에만 존재하는 수백 개의 회사 팻말이 걸려 있었다는 군요. 이 회사 이사는 수백 개 페이퍼 컴퍼니의 이사를 겸직하는 ‘유명 인사’라고 하네요.

버뮤다에서 방문한 곳은 페이퍼 컴퍼니의 돈을 맡아 관리해 주는 신탁은행. 2층짜리 허름한 건물에 들어선 이 은행의 수탁액 규모가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수백조원이라는 말을 듣고 입이 딱 벌어졌다고 합니다.

최근 한국 증시 급락의 원인 제공을 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상당수도 이 지역에 국적을 두고 있습니다. 2003년 3월부터 올해 3월까지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버진아일랜드, 케이맨 제도, 라부안, 버뮤다 등에 국적을 둔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증시에서 사들인 주식 순매수 규모는 5조5700억원에 이릅니다. 단기 투자를 일삼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익을 올리면 요즘처럼 악재가 불거질 경우 손을 털고 나가기 일쑤입니다.

조세 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세우고 역으로 국내에 투자하는 ‘검은 머리 외국인’들이 적지 않다는 말도 들립니다. 특히 라부안의 경우 말레이시아와 조세협약을 체결하면서 예외조항을 두지 않아 이곳에 국적을 둔 헤지펀드의 자본 소득에 과세를 할 수가 없습니다. 국세청 관계자에게는 끔찍한 이름이지만 돈에 눈이 먼 일부 기업인에게는 자본주의가 낳은 기이한 ‘지상 낙원’인 셈입니다.

박용 경제부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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