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이대로 주저앉나]금융시장 일제히 요동

  • 입력 2004년 5월 10일 18시 46분


‘증시 하락세 지속.’(오전 10시)

‘낙폭 증가하며 800선 위협받고 있음.’(오전 11시반)

‘200일 이동평균선(특정기간의 주가를 평균해 연결한 선) 붕괴.’(낮 12시50분)

‘종합주가지수 800선 붕괴.’(오후 1시58분) ‘종합주가지수 낙폭 67포인트까지 벌어지며 770선 위협.’(오후 2시41분)

10일 서울 여의도 대신증권 객장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썰렁한 객장을 지키고 있던 개인투자자 몇 명이 망연자실한 채 전광판을 쳐다봤다. 한 투자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중간에 자리를 떴다.

다른 한 투자자는 영업 직원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전쟁이라도 터졌느냐”고 물었다. 1987년 미국의 ‘블랙 먼데이(black monday)’를 방불케 하는 충격적인 장세였다.

▽패닉 상태에 빠진 증시=이날 종합주가지수는 7일보다 48.06포인트 빠진 790.68로 장을 마감했다. 5일 이동평균선이 120일선을 뚫고 내려가는 ‘데드 크로스(dead cross)’가 발생했고 800선이 무너진 뒤부터는 하락폭이 커지며 장중 한때 771.31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이날 하락한 종목은 거래소에서만 699개에 달했다. 이날 하락폭은 2002년 6월 26일 이후 가장 컸다. 투매 양상도 나타났다.

선물(先物)시장에서도 급락세가 나타나면서 ‘사이드 카(side car·선물가격이 급등락할 때 시장 안정을 위해 잠시 프로그램 매매 호가를 정지시키는 것)’가 발동됐다. 이날 선물 6월물 가격이 103.45(5.13% 하락)까지 하락하는 등 하락률 5% 상태가 1분 이상 지속되면서 오후 2시14분부터 5분 동안 프로그램 매매 호가가 정지됐다. 사이드 카가 발동된 것은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3월 12일 이후 올해 두 번째다.

개인투자자 윤모씨(54)는 “갑작스러운 급락세에 손쓸 틈조차 없었다”며 “820선에서 조만간 반등할 것이라는 증권사 전망을 믿고 있었는데 이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애를 태웠다.

또 다른 투자자 김모씨(30)는 “하루 만에 손실 폭이 너무 엄청나서 이제는 팔 수도 없는 상황”이라며 오히려 추가 매수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할 말 잃은 투자자들=당황한 것은 영업직원들도 마찬가지다. 익명을 요구한 D증권사의 한 직원은 “종합주가지수 앞자리에 설마 ‘7’이라는 숫자가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며 “투자자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울 명동과 강남 등 증권사들의 주요 지점 객장에는 오후 들어 간혹 투매에 동참하려는 고객들의 문의를 제외하고는 전화조차 끊겼다.

수천억, 수조원의 돈을 굴리는 기관투자가들은 상황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한 기관투자가는 “올해 처음으로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서면서 하루에만 40억원 이상의 손해를 봤다”며 “앞으로의 투자전략을 놓고 하루 종일 회의가 진행됐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에 따르면 운용자금이 큰 일부 기관의 손실은 1000억원대를 넘어선다.

한편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미국의 금리상승 가능성에 따른 달러 강세-엔화 약세의 직접적 영향을 받아 폭등(원화가치 하락)세를 보였다.

외환은행 자금팀의 구길모(具吉謨) 과장은 “세계적 달러 강세로 엔-달러 환율이 지난 주말보다 폭등하면서 원-달러 환율도 이에 연동해 크게 상승했다”면서 “또 그동안 한국시장에서 주식을 판 돈을 현금으로 쥐고 있던 외국인들도 자금을 빼기 위해 달러를 사들이고 있어 당분간 환율은 상승세를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10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미국 경제전문 통신사 블룸버그사의 한 직원이 폭락한 주가 등 주요 금융지표를 본사에 알리고 있다. 그래프는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환율, 종합주가지수, 선물지수, 코스닥 지수를 나타낸다.-박주일기자

▼‘체력 약한 한국증시’ 외국인 떠나나▼

작년 5월 이후 ‘바이(buy) 코리아’를 주도하며 상승장을 이끌었던 외국인들이 ‘셀(sell) 코리아’로 돌아서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한국증시를 짓누르고 있다.

실제로 외국인들의 매도세가 지속되면서 최근 10여일간의 주가 하락폭이 1997년 외환위기에 육박하는 수준에 달했다.

▽외국인 ‘셀 코리아’인가=외국인들은 4월 27일 이후 이날까지(9거래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모두 2조6000억여원어치의 주식을 팔아치웠다. 이들은 이날 주가하락폭이 심해지자 장중 한때 600억원에 이르던 매도규모를 장 막판에는 300억원대로 절반 가까이 줄였다. 한국주식을 팔면서도 발 빠르게 ‘저가 매수’에 들어가는 등 기민한 매매패턴을 보였다.

증시전문가들은 최근까지 한국 물을 매도한 외국인 세력들은 대부분 ‘작년 9월 이후 한국에 들어온 헤지펀드라고 분석한다. 이들이 들여온 자금규모는 3조원 안팎. 최근 2조6000억원가량 매도하면서 헤지펀드의 매도공세는 한풀 꺾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이 갑작스럽게 매도세로 돌아선 것은 △중국 쇼크(중국 경제 긴축우려) △미국 금리인상 임박 △고유가 등 증시 외부환경이 나빠졌기 때문이라는 분석.

이런 이유 때문에 이날 일본 대만 싱가포르 등 대부분의 아시아증시도 동반 급락했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박윤수 LG투자증권 상무는 “한국은 그동안 ‘중국효과’와 ‘저금리 기조’의 최대 수혜국이었으나 이런 호재의 약발이 떨어지면서 상대적으로 충격이 더 컸다”고 말했다.

중국 경기둔화와 미국 금리인상으로 올해 하반기부터는 한국 수출전선에도 상당한 먹구름이 낄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취약한 한국증시=외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셀 코리아’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 한국 증시의 투자매력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라는 게 외국계 증권사의 대체적인 판단이다.

윤용철 리만브러더스증권 상무는 “한국증시의 상승 모멘텀이 꺾인 것은 확실하다”며 “중국쇼크와 금리상승, 유가인상 등 해외변수에 가장 취약하다는 게 한국경제의 최대 약점”이라고 진단했다. 윤 상무는 내년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도 종전 5.5%에서 5.0%로 낮췄다고 덧붙였다.

폴 암스트롱 KB투신운용 상무는 “중국 경기의 ‘슬로 다운’은 한국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며 외국인 투자자들은 이 점을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재욱 UBS증권 지점장은 “한국증시의 주가하락폭이 다른 아시아 증시에 비해 큰 것은 외국인 매물을 받아줄 국내 매수 세력이 없기 때문”이라며 “외국인들은 당분간 금리인상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좀더 주식을 내다팔 것”으로 예상했다.

내수부문이 취약한 것도 한국증시의 고질적인 문제다. 조홍래 동원증권 부사장은 “조기 내수회복에 대한 기대는 물 건너 간 것 같다”며 “외국인들도 내수부진이 한국증시 상승세에 제동을 걸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불명예 기록 속출▼

최근 이어진 주가 폭락으로 열흘(거래일 기준) 동안 증권거래소와 코스닥 시장에서 70조원 이상의 시가총액이 공중으로 사라졌다.

10일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종합주가지수는 4월 23일에 연중최고치인 936.06까지 오른 뒤 26일부터 이달 10일까지 10거래일 동안 145.38포인트(15.53%)나 급락했다. 코스닥주가지수도 연중최고치를 기록했던 지난달 26일의 491.53과 비교하면 84.12포인트(17.11%) 폭락했다.

이에 따라 거래소 시가총액은 지난달 23일 413조3950억원에서 이달 10일 352조8620억원으로 60조5330억원 급감했다. 코스닥시장도 10조2700억원이 줄어들면서 ‘중국 쇼크’ 전후(前後)로 시작된 증시 급락 기간에 무려 70조8030억원의 시가총액이 날아갔다.

10일 종합주가지수 하락폭(48.06포인트)은 역대 9위의 기록이다. 하루 거래일 동안 주가가 가장 많이 떨어진 것은 2000년 4월 17일의 93.17포인트. 당시 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지면서 나타난 미국 나스닥 증시의 급락 여파가 국내 증시에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사상 최대의 주가폭락으로 이어졌다. 이어 △2000년 1월 5일 72.73포인트 △1999년 7월 23일 71.7포인트 △2001년 9월 12일 64.97포인트 순으로 주가하락폭이 컸다.

삼성전자(보통주 기준)도 최근 열흘 동안 주가가 20%가량 급락하면서 시가총액이 20조원가량 급감해 75조원대로 주저앉았다.

코스닥시장에서도 불명예 기록이 속출했다.

10일 코스닥주가지수는 작년 4월 9일 이후 최저치 수준으로 떨어졌다. 하루 하락폭(28.84포인트)은 2002년 7월 22일의 38.60포인트 이후 가장 컸다. 코스닥시장에서 주가가 떨어진 종목수(741개)는 2003년 4월 25일(750개) 이후 가장 많았다. 하한가 종목(174개)도 올해 들어 가장 많았다.

한편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환율은 달러당 1183.1원으로 1월 20일 1188.0원 이후 111일 만에 최고치로 상승(원화가치 하락)했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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