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투자자들은 △가능한 한 정부 간섭을 줄이고 △시장경제 원칙을 준수하며 △노동시장 등 모든 시장의 유연성을 높여가고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을 개혁으로 보고 있다는 것.
그러나 한국에서는 총선 이후 거꾸로 정치권을 중심으로 ‘개혁을 위해’ 정부 개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특히 과반수 의석 확보로 ‘힘’을 얻은 여당에서 이런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갑자기 ‘개혁 대상’으로 몰린 대기업들은 한층 기가 꺾였다.
▽경제 불안심리 부추기는 ‘개혁’ 구호=요즘 정치권에서는 ‘개혁’이 가장 ‘인기 있는 구호’가 됐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일부 당선자들은 아예 ‘개혁파’로 분류된다. 원내 진입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들이 ‘개혁’이라고 말하는 내용 중에는 반(反)시장경제적 정책과 국가개입 확대 정책도 적지 않다.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10일 이 부총리와의 면담에서 “잘못된 관행이 많이 개선됐지만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며 ‘개혁’을 주문하기도 했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최근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며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을 추진하고 있다. 이른바 ‘재벌’의 무분별한 지배력 확장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개혁을 ‘국가 개입’과 동일시하는 것은 맞지 않으며 때로는 상당히 위험하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중앙대 홍기택(洪起澤·경제학) 교수는 “과거 경험으로 보면 ‘시장 실패’보다 ‘정부 실패’가 더 많았다”며 “정부가 의욕적으로 시장에 개입했다가 실패할 경우 그 비용이 너무 크다”고 경고했다. 시장이 실패할 경우 정부가 때로는 개입해야 하지만 정부의 대체적인 역할은 공정한 관리자로서 시장이 자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그쳐야 한다는 것.
그런데 최근 들어 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투자자와 기업의 불안심리가 가중되고 있다. 중국 쇼크, 고(高)유가와 같은 해외 변수에 대해 국내 금융시장이 다른 나라보다 타격이 컸던 것도 총선 이후 정치권과 정부를 중심으로 본격화되고 있는 ‘시장 개입 움직임’에 대한 외국인의 불안심리가 반영됐다는 지적도 있다.
▽‘진짜’로 개혁해야 할 대상은?=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소(IMD)는 4일 올해 국가경쟁력 순위를 발표했다. 한국의 ‘성적표’는 전체 조사대상국 60개국 중 35위. 경쟁상대인 싱가포르(2위) 홍콩(6위) 대만(12) 등은 이미 한국에 멀찌감치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50위였던 인도도 한국을 추월해 34위에 올랐다.
눈길을 끄는 점은 한국에서 대표적 ‘개혁 대상’으로 자주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기업의 효율성이 29위로 ‘개혁 주체’인 정부의 효율성(36위)을 크게 앞서고 있다는 점. 노사문제는 꼴찌인 60위, ‘대학교육이 경제적 수요를 충족하는지’를 평가한 항목에서는 59위였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정부와 정치권이 효율성이 높은 기업을 개혁하겠다고 나선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개혁이 절실하게 필요한 노사문제, 교육문제 등은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에 부닥쳐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또 대학교육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제 정치권 일각에서는 ‘교육개혁’을 위해 고교평준화를 넘어 대학도 평준화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거침없이 나오고 있다.
자유기업원 권혁철(權赫喆) 법경제실장은 “정치권과 정부가 기업을 잠재적인 범죄집단으로 간주하고 각종 규제를 내놓는다면 한국의 국제경쟁력은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퇴보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LG경제연구원 오문석(吳文碩) 상무는 “과거의 시각에 집착해 기업을 규제하는 것을 개혁으로 생각하는 세태를 보면 안타깝다”며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쪽으로 개혁이 추진돼야 그 과정에서 성장과 분배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종식기자 kong@donga.com
▼정권바뀌면 ‘개혁구호’단골 등장▼
“개혁 구호는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까?”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 열풍’에 휩싸였다. 새 정권은 항상 전임 정권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며 ‘개혁 정책’을 앞 다퉈 내놓았다. 특히 정권 초기 의욕적으로 내놓은 개혁 정책들은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장식돼 당장이라도 선진국에 들어설 듯한 환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개혁 정책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퇴보했다는 평가가 많다.
한국경제연구원은 1980년대 말 이후 경제민주화와 균형성장 정책이 추진됐지만 오히려 경제 역동성을 악화시킨 것으로 분석했다.
실제로 1970∼1987년 제조업 부문의 연평균 자기자본 경상이익률과 매출액 경상이익률은 각각 15.0%와 3.0%였다. 그러나 1988∼2002년에는 각각 6.8%와 1.8%로 떨어졌다. 총요소 생산성 증가율도 1964∼1987년에는 연 평균 5.6%였으나 1988∼2000년에는 3.5%로 낮아졌다.
정권마다 강조했던 도시와 농촌의 균형발전 정책도 마찬가지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농촌 구조조정을 위해 52조원 이상이 투융자 자금으로 지원됐지만 도시근로자 가구소득에 대한 농가 소득 비중은 1995년 95.1%에서 2002년 73.0%로 크게 떨어졌다.
형평과 분배지향 정책도 역대 정권마다 ‘단골 메뉴’로 내세웠지만 결과는 소득분배 악화로 나타났다. 1994년에 21%였던 상류층이 2001년에는 22.7%로 증가한 반면 빈곤층은 같은 기간에 8.8%에서 12.0%로 늘어났다. ‘개혁 정책’이 역설적으로 빈부 격차를 오히려 심화시킨 셈이다.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左承喜) 원장은 “1980년대 말 이후 한국은 분배와 분산, 평등 등을 강조하는 정책만 개혁으로 보는 착각에 빠졌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며 “진정한 개혁 정책은 열심히 하는 기업이나 개인의 의지를 꺾지 않는 시장경제원칙을 보호하고 활성화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송진흡기자 jinhup@donga.com
▼선진국은 이렇게 했다▼
영국 독일 아일랜드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우리 시대 진정한 경제개혁의 내용과 방법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인 마거릿 대처 여사는 1990년 11월 사임할 때까지 11년간 총리로 재임하면서 영국 경제의 기틀을 흔드는 대혁신을 했다.
대처 여사는 작은 정부, 시장원리와 경쟁주의, 비대해진 노동조합의 권한 축소, 국영기업의 과감한 민영화 등을 골자로 하는 경제개혁을 통해 ‘영국병(病)’을 치유했다.
그가 총리에 취임할 당시 영국은 만성적인 노사 분규와 과도한 사회보장제도로 피로 증세를 보이는 ‘늙고 병든 나라’였다. 실업자가 110만명이나 됐고 연간 금리는 12%, 물가는 13.4%의 높은 수준이었다.
대처 여사는 취임하자마자 다섯 차례에 걸친 노동관계법 제정 및 개정을 통해 노조파워를 무력화시켰다. 효율성 없는 공기업은 과감하게 민영화시켰다. 경쟁력을 잃은 금융산업을 살려내기 위해 과감한 개방과 경쟁을 도입했다. 기업 활동을 옥죄는 각종 규제를 대폭 완화하거나 철폐했다.
그 결과 영국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미국만큼 높고 실업률은 세계적으로도 낮은 나라로 변모했다. 외국인 직접투자도 급증했다. 전문가들은 그의 개혁에 대해 ‘자유시장경제의 위대한 승리’라고 표현한다.
사회보장의 천국으로 알려졌던 독일도 분배보다 성장과 고용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실업자가 450만명을 넘어서는 등 경제가 붕괴 상태에 이르자 ‘분배중시’ 정책을 포기한 것.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은 98년 집권 이래 표방해오던 복지확대 정책을 지난해 6월 포기하고 노동시장 유연화와 기업부담 경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어젠다 2010’을 채택했다.
슈뢰더 총리는 야당의 협조까지 이끌어내 지난해 말 연방국회에서 ‘어젠다 2010’을 통과시킨 뒤 개혁정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아일랜드도 경제개혁에 성공한 나라로 손꼽힌다.
아일랜드는 87년 실업률이 20%에 육박하고 물가상승률(15%)과 공공부채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자 경제개혁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연간 임금인상률을 3년간 2.5%대로 묶고 법인세 감면 폭을 확대하며 외국기업 유치를 위한 지원 등의 내용이 골자였다. 노동계가 정부 프로그램에 동참했고 야당도 협조했다.
몇 년간의 고통을 참아낸 뒤 90년대 들면서 개혁의 열매가 열리기 시작했다. 정보통신 화학 금융부문 등에서 내로라하는 다국적기업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현재 IBM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등 1000여개의 첨단 외국인 투자기업이 아일랜드로 들어와 기업 활동을 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1인당 국민소득은 87년 1만달러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2001년에는 3만1000달러를 넘는 부자 나라가 됐다.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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