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세계가 주목한다]<1>고구려는 누구의 역사인가

  • 입력 2004년 6월 25일 18시 19분


고구려 제천 행사의 전 과정을 담은 중국 지린성 지안시 장천 1호분 벽화. 벽화속 제천행사나 의복이 중국의 풍속과 분명히 다르다.-동아일보 자료사진
고구려 제천 행사의 전 과정을 담은 중국 지린성 지안시 장천 1호분 벽화. 벽화속 제천행사나 의복이 중국의 풍속과 분명히 다르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유적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를 결정할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28회 총회가 28일부터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열린다. 이번 총회의 결정은 고구려사가 한국과 중국, 어느 국가에 귀속되는지에 대한 역사논쟁의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쑤저우 회의를 맞아 고구려의 정체성을 조명하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그 첫 회로 고구려연구회 창립 1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28∼30일 세종문화회관 컨퍼러스홀)에 제출된 쑨진지(孫進己) 선양(瀋陽)동아연구중심 주임의 발제문과 이에 대한 최광식 고구려연구재단 상임이사의 반론을 쟁점별로 살펴본다. 정리=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 중국측 주장

쑨진지 선양 동아연구중심 주임

“땅-제도 중국의 일부”

●고구려가 조선이라는 선입견을 버려라

고구려가 곧 고려이고 고려가 곧 조선이라는 일종의 습관적 견해가 이미 형성됐다. 그러나 고려는 고구려 영토의 3분의 1, 인민의 4분의 1만 계승했다. 영토의 3분의 2와 인민의 4분의 3은 중국에 계승됐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라면 중국 또한 고구려의 계승자다.

●역사 귀속과 현실의 계승은 다른 문제다

프랑크 왕국이 오늘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포괄했다고 해서 오늘의 프랑스가 독일과 이탈리아의 역사를 자국사(自國史)에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반면 인디언의 역사는 오늘의 미국의 역사인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사례에 비추어 고구려의 역사는 그 영토와 인구의 대부분을 계승한 중국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인 것은 고구려의 땅과 인민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그 발해의 땅과 인민을 계승한 나라는 어디인가.

●고구려는 민족이나 문화상 한국 보다 중국에 가깝다

고구려인은 맥(貊·부여)인, 고이(高夷)와 한인(漢人)에서 기원했다. 맥인(貊人), 이인(夷人), 한인은 모두 중국의 민족이고 동족이란 점에서 신라나 백제와 다른 민족이다. 또 한반도에서 형성된 고조선과 달리 고구려는 중국대륙에서 형성됐다는 점에서 고조선의 후예도 아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습속이 비슷한 점은 신라, 백제가 고구려 습속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부라는 근거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은 민족 정권은 둘로 나눌 수 있다. 중국의 책봉과 함께 중국 관직을 겸한 경우와 책봉만 받고 중국의 관직을 겸하지 않는 경우다. 고구려 왕은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이나 평주자사(平州刺史) 같은 중국의 관직을 겸했다. 발해 국왕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나 홀간주도독(忽汗州都督) 등의 관직을 받았다. 따라서 중국의 지방정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국왕은 신하를 칭했을 뿐 관직을 겸하지는 않았다. 신라 왕도 당의 관직을 받은 적이 있지만 900여년의 역사 중 300년 정도에 불과했다. 일본도 한(漢)대와 남북조 시대 중국 관직을 받았으나 이는 전체 역사에서 매우 짧은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들 국가는 속국이라 칭할 수는 있어도 지방정부는 아니다.

○ 한국측 반박

최광식 고구려연구재단 이사

“現영토 기준의 강변”

●고구려가 조선이라는 선입견을 버려라?

선입견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와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사강목’ ‘동국통감’에 고구려가 기재된 것은 고려와 조선이 고구려를 역사적으로 계승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반면 중국측 사서에는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에 대한 편목을 찾을 수 없다. 또 중국 교과서조차 최근까지 고구려사를 한국의 역사로 인정해 왔다.

●역사 귀속과 현실의 계승은 다른 문제다?

지금을 기준으로 영토의 몇 분의 1, 인민의 몇 분의 1을 누가 차지했느냐를 따지는 것은 현재를 위해 과거를 끌어다 붙이는 ‘고위금용(古爲今用)’의 논리일 뿐이다. 역사해석이 역사적 계승관계의 사실여부를 떠나 현실적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면 이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사실(史實)을 왜곡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에는 중국과 다른 독자적 천하관을 지녔다는 점도 중요하다.

●고구려의 민족구성이나 문화가 한국 보다 중국에 가깝다?

고조선족은 상인(商人), 양이(良夷), 예인(穢人)에 기원했고 고구려인은 맥인, 고이와 한인에서 기원했다는 중국의 주장은 ‘일주서(逸周書)’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고이족은 기원전 10세기경 등장하는 종족으로 기원전 1세기에 등장하는 고구려와 시기가 맞지 않는 등 일주서는 문제가 많은 사서이다. 또 고구려가 중국대륙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은 지금의 영토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당시에는 중국 영토라고 볼 수 없다. 고구려는 복식과 관혼상제, 묘제 등의 여러 문화에서 중국과 달랐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부다?

첫째, 정동장군 내지 형주자사는 실제 역할을 맡은 관직이 아니라 명예직인 관작이었다. 둘째, 관작은 당시 중국 왕조가 자기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외교적으로 고구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준 것이지 정치적 상하관계로 부여한 것이 아니다. 셋째, 이는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나 신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백제 무녕왕도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이란 관작을 받았다. 넷째, 고구려가 오랜 기간 관작을 받았다고 했지만 고구려가 존속한 700년간 중국에서 일어났다 사라진 20여개 왕조로부터 단속적으로 받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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