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세계가 주목한다]<2>북한-중국 무엇을 신청했나

  • 입력 2004년 6월 28일 18시 31분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최종 결정할 세계유산위원회(WHC) 28차 총회가 28일 중국 장쑤성 쑤저우에서 열렸다. 이날부터 7월7일까지 계속될 이번 총회에서 북한과 중국에서 각각 신청한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결정된다.-쑤저우(중국)연합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최종 결정할 세계유산위원회(WHC) 28차 총회가 28일 중국 장쑤성 쑤저우에서 열렸다. 이날부터 7월7일까지 계속될 이번 총회에서 북한과 중국에서 각각 신청한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결정된다.-쑤저우(중국)연합
고구려는 존속하던 705년 동안 수도를 크게 세 번 옮겼다. 기원전 37~3년 홀본(졸본·卒本), 3~427년 국내성, 427~668년 평양이 그것이다. 현재 중국 장쑤(江蘇)성 쑤저우(蘇州)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유산위원회(WHC) 총회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된 고구려 유적들은 모두 이 세 수도를 중심으로 퍼져 있다.

:북한:

모두 63기의 고분군을 신청했다. 이 중 16기는 벽화고분으로 평양시, 남포시 평안남도, 황해도 안악에 분포돼 있다.

평양시 지구에는 동명왕릉으로 알려진 진파리 10호와 진파리 1·4호, 호남리 사신무덤이 있다. 이 중 진파리 1호에는 사신도(四神圖)와 함께 소나무가 그려져 있어 우리나라 최초의 산수화로 꼽힌다.

남포지역에서는 강서대묘, 쌍영총, 약수리 덕흥리 수산리 고분, 용강대묘의 고분 벽화들이 모두 신청됐다.

특히 수산리 벽화의 주름치마 입은 여인상은 일본 나라현 다카마쓰(高松塚) 고분에 그려진 여인과 관련성이 높아 일본이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거나, 고구려 유민들이 일본 초기 문화를 일구었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다.

황해도 안악 3호 무덤 벽화에는 주인공 부부와 250명에 가까운 인물들이 그려진 행렬도를 비롯해 당시 생활을 알 수 있는 수많은 그림들이 있어 일종의 타임캡슐이다.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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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존속하던 705년 동안 수도를 크게 세 번 옮겼다. 기원전 37~3년 홀본(졸본·卒本), 3~427년 국내성, 427~668년 평양이 그것이다. 현재 중국 장쑤(江蘇)성 쑤저우(蘇州)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유산위원회(WHC) 총회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된 고구려 유적들은 모두 이 세 수도를 중심으로 퍼져 있다.

:북한:

모두 63기의 고분군을 신청했다. 이 중 16기는 벽화고분으로 평양시, 남포시 평안남도, 황해도 안악에 분포돼 있다.

평양시 지구에는 동명왕릉으로 알려진 진파리 10호와 진파리 1·4호, 호남리 사신무덤이 있다. 이 중 진파리 1호에는 사신도(四神圖)와 함께 소나무가 그려져 있어 우리나라 최초의 산수화로 꼽힌다.

남포지역에서는 강서대묘, 쌍영총, 약수리 덕흥리 수산리 고분, 용강대묘의 고분 벽화들이 모두 신청됐다.

특히 수산리 벽화의 주름치마 입은 여인상은 일본 나라현 다카마쓰(高松塚) 고분에 그려진 여인과 관련성이 높아 일본이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거나, 고구려 유민들이 일본 초기 문화를 일구었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다.

황해도 안악 3호 무덤 벽화에는 주인공 부부와 250명에 가까운 인물들이 그려진 행렬도를 비롯해 당시 생활을 알 수 있는 수많은 그림들이 있어 일종의 타임캡슐이다.

:중국:

크게 보아 수도(首都), 왕릉, 귀족무덤의 세 가지 형태로 등재 신청했다.

고구려 첫 수도인 홀본은 현재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현에 있는 오녀산성 정상의 유적을 말한다. 해발 820m의 산 정상에는 집터와 병영 터, 창고 같은 유적들이 있고 동쪽에는 잘 쌓은 산성이 있어 고구려 첫 수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 번째 수도로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에 있는 국내성의 경우, 시내 한복판에 아파트들이 들어차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던 서벽을 300여 호의 민가를 철거하고 6개월 만에 모두 정비 복원했다. 지안시의 환도산성도 대대적인 발굴을 통해 궁전 터가 정비됐고 성문터도 복원됐다. 광개토대왕비와 태왕릉 사이에서도 400호 가까운 민가를 철거해 제사터를 발굴했다.

중국은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2003년 6개월 만에 약 500억원을 들여 1000호에 가까운 민가를 철거하고 대대적인 발굴을 했다.

중국이 등재 신청한 12기의 왕릉은 광개토왕릉과 장수왕릉(장군총) 등 크기나 축조법에서 가히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무덤들이다. 귀족무덤으로 신청한 26기의 고분 가운데 16기는 벽화고분이다. 무용총(춤무덤)과 각저총(씨름무덤), 오묘(五廟) 4, 5호 등이다.

북한과 중국이 등재 신청한 결과만 놓고 보면 마치 고구려의 수도와 중심지는 모두 중국 땅에 있고 북한에는 일부 고분군만 남아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은 앞으로도 평양의 안악궁, 대성산성, 평양성, 청암리토성 같은 성터 유적과 정릉사, 광법사 등 고구려 절터(중국에서는 단 하나의 절터도 발견되지 않았다)를 기준에 맞게 정비해 추가 등재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서 길 수 고구려연구회 회장·서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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