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9일 아침 7시 서울 청진동 해장국집을 들어서는 그의 손에는 말쑥한 양복에 어울리지 않는 색 바랜 가방이 들려 있었다. 약간 수척해 보였다. 총선과 6·5 지방선거 재·보궐 선거의 피로가 아직 덜 풀렸다고 한다.
그래도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진 편이다. 옛날에는 아무도 없는 길거리에서 유세하면서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나’하고 스스로 수도 없이 되묻곤 했단다.
“허전하지 않으세요?”
국민승리21 이후 7년간 맡아온 당 대표직을 최근 물러난 데 대한 소감부터 물었다.
“엄밀히 말하면 88년 언론노조위원장 이래 16년 만에 장(長)을 놓은 거지요.”
슬쩍 ‘자랑’을 걸치지만 밉게 들리지 않는다.
“복잡한 조직을 오랫동안 이끈 리더십의 비결은 뭡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때로는 우유부단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지도자가 이런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면 조직도 깨지고 자신도 깨집니다. 달리 말하면 ‘통합력’의 미덕이지요.”
그에게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란 평이 따라다닌다. 온갖 논쟁과 대립을 특유의 미소와 침묵으로 지켜만 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승부수를 던진다. 대표적인 예로 96년 말 노동법 개정에 맞선 총파업, 또 민노총과 민노당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그의 통합력과 결단력은 빛을 발했다.
통합력에 관한 한 그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 낙제점을 줬다. “‘통 큰 정치’를 안 한다”는 이유에서다.
“대통령 자신도 통합력을 내세우긴 하지만, 국민 다수가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럼 아닌 거죠. 노동문제도 그렇습니다. 노 대통령은 노동자에 대해 섭섭하다고 하지만, 그야말로 노동자 농민을 배신했습니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얼굴이 상기됐다.
정책으로 말머리를 돌리자, 대선 후보 ‘재수생’답게 정리된 답변이 이어졌다.
‘민노당의 재벌해체 주장이 너무 강경한 표현 아니냐’고 공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예상 외로 씩 웃는다. 그리곤 이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재벌해체는 기업해체가 아닙니다. 황제식 경영시스템을 해체하자는 것입니다. 국가경쟁력 차원에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재벌총수가 1%도 안 되는 지분으로 경영의 전권을 행사하는 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투명성과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주장이다. “재벌 회장의 개인적 취향 때문에 무모하게 사업 확장에 나섰다가 낭패를 보는 것도 황제식 경영 때문입니다. 삼성자동차를 보세요.”
경제위기 문제로 얘기가 넘어가자 그는 직접 만난 서민들을 예로 들었다.
“노 대통령은 경제위기가 아니라고 하지만, 국민 90% 이상이 더 어려워졌다고 느끼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한 구멍가게 주인은 ‘전에는 아들들 대학 공부까지 시켰는데 이제는 두 부부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며 ‘경제가 문제없다는 노 대통령은 어느 나라 대통령이냐’고 흥분하더라고요.”
‘과도한 분배 요구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재계의 우려가 있다’는 말에 그는 숟가락을 놓고 정색을 했다. 비정규직과 빈부격차 문제를 사례로 든 반박이 이어졌다. 비정규직 양산이 소득 감소를 낳고, 소비 위축과 경기 침체로 이어져 서민의 삶이 더욱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런 만큼 비정규직에 대한 처우개선이라는 소득재분배과정이 경제 활성화의 추동력이 된다는 설명이다.
“노 대통령은 이 문제를 갖고 대기업 노동자와 하청기업 노동자를 대립시키고 있지만, 국가가 부유세 같은 혁명적 세제개혁으로 재원을 마련해 서민들의 교육비 의료비 주택비를 낮춰야 합니다.”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와 함께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살짝 내리쳤다. 그는 “40년 가까이 성장 정책을 펴왔는데도 문제가 있다면, 분배를 통한 성장 외에 대안이 없는 것 아니냐”고 동의를 구하듯 좌중을 둘러봤다.
화제가 북한 문제로 옮아가자 뿔테 안경 너머 그의 눈이 한층 빛났다.
“그 부분은 저의 마지막 꿈입니다. 남북 경제체제의 장점을 조화시켜 한국형 모델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손으로 해야 합니다. 만약 남북간에 미래 경제상에 대한 합의가 안 된 가운데 남북한 긴장이 완화되고 북한 시장이 개방되면, 미국 자본이 먼저 가서 ‘먹게’ 돼 있어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서 이 점을 설득하고 싶습니다.”
일사천리로 나가던 그는 그러나 ‘개발독재시대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비판하는 민노당이 북한 인권에는 왜 침묵하는가’라는 대목에 이르자 주춤했다.
“사실 당내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의 생존을 위해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알고도 모른 척하는 사려도 필요합니다.”
이념 문제로 넘어갔다. 진보가 보수보다 우월하다는 논거를 위해 스웨덴 프랑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구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싱가포르의 토지 공개념, 핀란드의 국영기업이 차례로 거론됐다.
“교육 의료 등 기본적 생존권은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데, 한국에선 유럽 우파 정권도 받아들인 모델조차 수용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원칙과 대중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진보적 목적으로 가기 위해 유연한 방법이 있다면 얼마든지 채택할 수 있다”고 답했다.
‘당 강령 중 일부 운동권식 거친 용어가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강령이 금과옥조는 아니다. 일상적인 정책을 봐 달라”고 비켜갔다. 이 같은 현실적 유연성이 역설적이지만 온갖 정파와 주장이 치열하게 맞부딪치는 진보진영의 꼭대기에 그를 밀어올린 자산이 된 듯하다.
마지막으로 평소 그의 지론인 ‘2012년 집권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97년 대선에서 참패하자 많은 사람이 다른 당으로 떠났습니다. 진보정당이 선거로 집권하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된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지금 그 사람들 만나보니 내심 후회하고 있더라고요. 두고 보세요.”
그의 장담대로 민노당의 질주가 앞으로도 이어질지가 주목된다.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아버지 삶에서 배운건 이념보다 공동체 의식”▼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의 생각이나 행동이 ‘빨갱이’처럼 비쳐져서는 살아가기 힘든 시대였습니다.”
권영길 전 대표는 ‘이념적 지향점이 가족사와 관계 있느냐’는 질문에 잠시 말문을 닫았다. ‘빨치산’의 아들로 겪어야 했던 숱한 고초가 머리를 스치는 듯했다.
이내 평정을 되찾은 그는 “아버지는 저의 가치관보다는 제 삶의 방식에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아버지의 삶을 통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 삶이란 것을 배운 거지요.”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던 그의 부친은 6·25전쟁 중 지리산에 입산해 투쟁하다가 사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조차 제대로 갖고 있지 않은 그가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고등학생 시절이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았던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는 사실이 어릴 때엔 믿어지지 않았다는 것.
한때 잘나가던 대기업 회장의 딸을 반려자로 맞은 일은 그의 이 같은 ‘과거’와 대비돼 한편의 드라마처럼 회자되기도 한다.
재산 문제도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애물단지다. 지난 총선에서도 농지로 돼 있는 서울 강남구 세곡동 소재 논 매입을 둘러싸고 상대 후보로부터 ‘투기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그는 “20년 전의 일에 대해 결백하다고 말하는 것 이외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고 답답해 했다.
“서울신문 재직 당시 파리 특파원으로 떠나면서 부동산을 처분해 후배에게 맡겼는데, 땅을 사두었더군요. ‘경작자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샀느냐’고 의구심들을 갖고 있는데, 정말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러나 개발제한구역이고 비행장 옆인데 투기 목적일 리가 있겠습니까.”
그는 “내가 갖고 있으니, 내가 풀어야 한다. (그 땅을) 처분하겠다”고 말했다.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차세대 리더십’ 시리즈 마지막 회가 지난달 18일(제4회) 이후 17일 만에 게재됩니다. 본래 정당 및 대상자의 가나다순에 따라 열린우리당 정동영 전 의장(현 통일부장관)을 게재해야 하나 정 장관이 장기간 미국을 방문한 데다 귀국 이후 입각을 이유로 인터뷰를 사양해 일정이 취소됐습니다. 이에 다음 차례였던 민주노동당 권영길 전 대표를 싣게 됐습니다. 게재가 늦어진 점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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