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우리 장수들 중에 동쪽으로 달아난 자만 해도 여남은 명은 넘을 것이오. 하나 공은 한번도 그들을 뒤쫓아 간 적이 없었는데, 이제 한신을 그렇게 뒤쫓아 갔다니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소!”
한왕 유방이 여전히 꾸짖는 말투로 그렇게 따졌다. 소하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차근차근 말했다.
“이제까지 달아난 그런 장수들은 얼마든지 쉽게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신처럼 빼어난 인물(國士)은 천하를 뒤져 둘을 찾아내기 어렵습니다(無雙). 대왕께서 이대로 한중(漢中)에 눌러앉아 왕 노릇이나 즐기시려면 한신을 부리셔야 할 일은 없겠습니다마는, 만일 동쪽으로 돌아가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서는 함께 일을 꾀할 만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 모든 것은 대왕께서 어떤 뜻을 품고 계신가에 달렸습니다.”
한왕이 그 말을 한번 멈춰 생각해보는 법도 없이 받았다.
“나도 또한 동쪽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오. 이 답답한 곳에 언제까지 머물러야 한단 말이오!”
“대왕께서 반드시 동쪽으로 돌아갈 뜻을 품고 계시다면 한신을 무겁게 쓰실 수 있을 것이고, 무겁게 써준다면 한신은 우리에게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한신을 무겁게 써주시지 않는다면 그는 끝내 달아나고 말 것입니다.”
소하가 다시 한번 한왕을 다그치듯 말했다. 한왕은 그러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소하의 눈길에서 한신에 대한 믿음과 아울러 아직도 꺾이지 않은 그 나름의 자부심을 보았다.
(이 사람이 한신을 그렇게 보았다면 나도 한신을 그렇게 믿어야 한다. 이 사람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시골 저잣거리 건달인 내게서 천하를 떠받칠 재목을 보고 서슴없이 자신의 삶을 건 사람이다. 만약 이 사람이 한신을 잘못 보았다면 나도 잘못 본 것일 수 있고, 그렇다면 내 남은 삶은 실로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는 삶이 되고 만다….)
한왕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때껏 한신에게 품었던 까닭모를 의구와 불안을 일시에 거두었다.
“알겠소. 내 공의 뜻을 따라 한신을 장수로 삼겠소!”
그러나 소하는 별로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말했다.
“장수로 삼는다 해도 한신은 우리에게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대장군으로 삼겠소!”
소하의 뜻을 알아본 한왕이 얼른 그렇게 한신을 높였다. 그제야 소하의 얼굴이 환해졌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리하시면 한신을 머무르게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한왕은 그 자리에서 한신을 불러 대장군으로 삼으려했다. 소하가 다시 차분하게 한왕을 깨우쳤다.
“대왕께서는 평소의 오만하고 무례하심 그대로 지금 대장군 세우는 일을 마치 어린아이 부르듯 하려 하십니다. 이번에 한신이 떠나려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정히 한신을 대장군으로 높이시려면 반드시 엄숙한 격식을 갖춰야 합니다. 좋은 날을 골라 재계(齋戒)하신 뒤에 크고 넓게 제단(壇場)을 쌓고 의례를 치른 뒤에 그를 대장군으로 세우십시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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