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하고 있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의 회장을, 그것도 삼성 경영자를 거론하는 게 부담스럽긴 하지만 이 회장은 잭 웰치나 스티브 잡스 이상으로 나에게 영감을 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많은 점에서 한국 경영사에 큰 전환점을 만들었다. 이는 회사를 창립하고 스스로 최고경영자(CEO)로 활동하면서 새삼스럽게 느끼는 부분이다.
이 회장 이전의 국내 그룹 총수나 사장은 개인의 탁월한 재능으로 자수성가하거나 기업을 이룬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과거에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진두지휘하고 일사불란하게 조직을 이끌어가는 것이 CEO의 미덕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영웅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기업 그 자체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 회장은 조직 전체 역량의 승화에 기업의 미래를 걸었다. 그것을 위해 전 직원의 공감대 형성에 가장 먼저 눈을 돌렸다. 국내 처음으로 현대적인 CEO 역할의 지평을 연 것이다.
이 회장은 또 디지털 시대의 화두를 최초로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전에는 마지못해 부수적으로 따라 다니던 고객과 서비스를 경영이념의 최상위 개념으로 끌어올렸다. 한 사람이 1만명을 먹여 살리는 천재론, 불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위한 변동 근무제로 기업경영의 스피드를 높인 것 등은 디지털 시대의 소비자 의식과 기업 경쟁력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으로 평가된다.
이륙 후 5분 이내에 최고 고도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747 이론’은 단숨에 규모화를 이뤄 2등과의 격차를 벌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비유로 지금도 내가 항상 고민하는 주제다.
레인콤의 경우 디지털 회사로 출범하면서 가장 먼저 서비스의 차별화에 주력했다. 시장 지배력을 키울 수 있는 규모화에도 역점을 두었다. 직원들을 속박하는 사규(社規)를 최소화하고 출퇴근 시간의 개념을 없앴다.
그 결과 레인콤에서는 업무에 피해가 없는 한 오전 10시에 출근해도 다른 사원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됐다. 소비자의 요구를 가장 잘 반영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제품 기획과정에서는 엔지니어가 아닌 사내외 마니아들의 의견이 우선적으로 반영된다.
사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한 본능적인 것이지만 돌아보면 이 회장이 평소에 강조했던 변화의 화두와 닮아 있음을 느낀다.
경영자의 입장을 떠나 이 회장에 대해 인간적인 호감을 갖는 또 다른 이유는 이 회장이 첨단 제품에 항상 관심을 갖고 남보다 빨리 사용해 보는 얼리어답터라는 점이다.
사물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과 예리한 분석력, 공학적인 관점을 넘어 감성으로 제품을 느끼고 미세한 장단점까지 지적해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얼리어답터다. 이런 능력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의 트렌드를 본능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또 다른 부류의 천재성이 아닐까.
양덕준 레인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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