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놀이와 예술’]<6>상상력의 축제, ‘숨은 그림 ’

  • 입력 2004년 7월 19일 18시 26분


H 번의 ‘그리스 섬에서의 바이런의 정신’(1830년경).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옆얼굴을 찾아볼 수 있다.
H 번의 ‘그리스 섬에서의 바이런의 정신’(1830년경).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옆얼굴을 찾아볼 수 있다.
어린 시절 구독하던 어린이신문에는 매일 ‘숨은그림찾기’가 실렸다. 대개 짤막한 이야기에 딸린 삽화인데, 그 안에는 빗자루 다리미 나뭇잎 등 여러 가지 물건들이 숨어 있었다. 그림을 샅샅이 훑어보다가 숨은 놈을 발견하면, 행여 도망이라도 갈까 잽싸게 동그라미를 쳐놓곤 했었다. 대부분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매번 한두 놈은 꼭꼭 숨었다가 한참이 지나야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숨바꼭질은 아이들만 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사물도 숨바꼭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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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래야, 술래야, 나 찾아봐라

아이들을 다 찾아내면 술래는 어떻게 하던가? 이제는 자기가 숨어야 한다. 숨은 그림을 다 찾아냈는가? 그럼 이제 우리가 숨을 차례다. 빗자루여, 다리미여, 나뭇잎이여, 이제 우리가 숨을 테니 너희들이 우리를 찾아라. 이 넓은 세상에 설마 우리 몸 하나 감출 곳이 없겠는가? 저 바위, 저 바다, 저 나무, 그 속에 우리는 얼마든지 모습을 감출 수 있다. 가령 그림○1을 보라. 저기에 누군가가 숨어 있다. 자, 보이는가?

바다를 향해 벌린 암벽의 틈, 그 위로 드리워진 나뭇가지를 통해서 한 사내의 프로필이 눈에 들어온다.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의 얼굴이다. 이 작품은 바이런(1788∼1824) 사후에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이 낭만주의 시인은 그리스의 자연과 하나가 된다. 그리스를 너무나 사랑했던 바이런은 그 나라의 독립을 도우려 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그곳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죽고 만다.

네덜란드 남부화파의 ‘여자의 머리’(16세기 후반). 풍경화 속에 여자의 머리 모습이 숨겨져 있다.

다음 그림○2를 보자. 양떼가 노니는 목가적 풍경. 우리는 그림을 보고 있으나, 언뜻 외려 그림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왜 그럴까? 누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90도 회전시켜 세워서 바라보라. 아리따운 여인의 프로필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머리를 뒤로 묶고, 목걸이를 하고,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이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돌리고, 시선을 우리 쪽으로 던지고 있다. 이렇게 사람의 형상을 감춘 풍경화를 ‘인형풍경(人形風景)’이라 부른다.

○ 풍경이 초상의 중의법

인형풍경은 특히 16, 17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가 있을 게다.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예술은 명료한 것을 좋아한다. 하나의 형상은 단 하나의 분명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16, 17세기는 서양미술사에서 바로크의 시대. 바로크는 형상의 의미를 일부러 모호하게 하여, 다중적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이런 시대정신이 반영된 모양이다. 저 그림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풍경화이면서 동시에 초상화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유화 ‘울리히 폰 후텐의 무덤’(1823∼1824년). 그림의 배경이 되는 석조건물 잔해의 3개의 창 사이로 사람형태를 찾을 수 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이는 무슨 얘기를 해도 같은 결론으로 귀결된다. 고정된 시각의 관습에 사로잡힌 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구름에서 구름을 보고, 바위에서 바위를 보고, 풍경에서 풍경을 볼 뿐이다. 반면 사유나 지각의 상투형에 사로잡히지 않은 어린아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하다. 아이들은 구름 속에서 토끼의 형상을 보고, 바위 속에서 동물의 형상을 보고, 풍경 속에서 인간의 얼굴을 볼 줄 안다.

상상력을 강조하는 낭만주의 시대에 인형풍경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그림○3은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이다. 폐허가 된 건물 앞에서 한 사내가 누군가의 무덤에 참배를 하고 있다. 상투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은 저기서 폐허와 무덤과 한 명의 나그네를 볼 뿐이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저 사내가 외롭지 않음을 본다. 그와 더불어 실은 세 명의 조문객이 무덤의 주인에게 고개 숙여 조의를 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형풍경이 바로크나 낭만주의의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아직 바로크를 몰랐던 알브레히트 뒤러 같은 르네상스 화가도 서로 마주보는 암벽의 실루엣으로 인간의 얼굴을 묘사한 바 있고, 낭만주의와 척을 진 사실주의 화가 구스타브 쿠르베도 쏟아지는 폭포의 암벽에 인간의 얼굴을 그려 넣은 바 있다. 사실 자연의 형상들 중에는 우리가 아무리 상상력을 억제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형상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

○ 세계와 무의식의 숨은그림찾기

살바도르 달리의 ‘편집증적 얼굴’(1931년). 달리는 자신의 예술창작 방법을 밝히면서 사막의 원주민들을 찍은 사진을 단순화해 사람의 얼굴을 닮은 새로운 이미지를 얻는 과정을 설명했다.

유럽인들에게는 이게 특별한 시각적 체험일지 모르나, 사실 자연에서 인간의 형상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별로 새로운 일이 아니다. 유럽대륙은 지질학적으로 노후한 지형으로 풍경의 대부분이 광활한 평지이나, 동양의 수려한 산수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보는 이의 마음속에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가령 한국의 웬만한 산과 바다에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사람의 이름을 한 바위들이 널려 있지 않은가.

구름을 토끼로 보고, 바위를 동물로 느끼고, 풍경을 인간으로 여기는 것이 합리적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정신병으로 여겨질지 모르겠다. 시각의 편집증이라고 할까? 그림○4는 초현실주의자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이다. 오두막 앞에 원주민들이 앉아 있다. 하지만 유령을 보는 영화 ‘식스센스’의 아이처럼, 달리의 눈은 저기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사진을 90도 회전시켜 세워서 보면 불현듯 인간의 얼굴이 나타난다. 이를 달리는 ‘편집증적 얼굴’이라 부른다.

살바도르 달리의 ‘환영에 사로잡힌 투우사’(1968∼70). 비너스 동상들 사이에 넥타이를 맨 남자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잠들면 우리의 이성도 함께 잠잔다. 이때 우리 의식의 스크린에는 무의식에 저장된 이미지들이 올라와 한바탕 축제를 벌인다. 꿈속의 사건들은 결코 합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꿈속의 형상들은 결코 합리적으로 결합되지 않는다. 마치 컴퓨터로 합성한 그림처럼 꿈에는 하나의 형상에 다른 형상이 겹쳐지곤 한다. 달리가 그린 그림○5의 비너스를 보라. 저 아름다운 몸매에 비너스의 얼굴이 겹쳐져 있다.

‘숨은그림찾기’는 어린이신문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세계 자체가 거대한 ‘숨은그림찾기’ 놀이다. 못 믿겠다고? 당장 당신 방구석의 전기 소켓을 보라. 거기에도 얼굴이 있어서 당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뿐인가? 의자, 책상, 소파, 나무, 건물, 자동차, 하늘의 구름과 흐르는 강물 속에 수많은 얼굴들이 숨어 있어 당신에게 눈길을 던지며 “나를 보아 달라”고 소리치고 있다. 당신은 왜 그 애절한 눈길들을 느끼지 못하는가?

진중권 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진중권의 ‘놀이와 예술’ 7회는 ‘물구나무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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