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없는 박근혜를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아이러니 자체가 역사라는 역설(逆說) 또한 가능하다.
역설이 가능한 근저(根底)에는 박정희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하나는 근대화 산업화의 긍정적 평가요, 다른 하나는 반(反)민주 인권탄압의 부정적 평가다. 명암(明暗)의 평가는 현재진행형이다. 따라서 박정희는 아직 ‘역사적 인물’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현재적 인물’이다.
▼‘현재적 인물’의 비극▼
박정희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현재적 인물’이라는 사실은 비극이다.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가 결과적으로 민주화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그 시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시대의 이행과정에서 빚어진 공과(功過)를 냉정하게 정리하고 박정희는 그만 ‘역사적 인물’이 되도록 해야 한다.
요즘 여권이 하듯, 딸에게 아버지의 책임을 묻는 식의 저열한 정치공세로는 박정희가 오히려 무덤 속에서 걸어 나올 것이다. 지난 시대 총체적 삶의 모습인 역사를 단절적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과거 청산이 될 수 없다. 청산은커녕 과거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기 십상이다. 하물며 거기에 정략적 의도가 개입하고 감성적 지역주의까지 가세하면 나라는 극심한 분열과 대립으로 치달을 위험성이 크다. 그래서는 한걸음도 미래로 나갈 수 없다.
박근혜 대표의 딜레마는 ‘현재적 인물’인 아버지로부터 짐짓 달아날 수도, 그렇다고 아버지를 마냥 끌어안을 수도 없다는 데 있다. 그는 왜 자꾸 돌아가신 분을 끌어들이느냐고 항변하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그의 숙명(宿命)이다.
그러나 ‘독재자의 딸이 야당 지도자가 웬 말이냐’는 식의 논리는 비(非)이성적이다. 비록 ‘아버지의 후광(後光)’이 크게 작용했다고 하더라도 아버지 박정희가 딸 박근혜를 야당 지도자로 만든 것은 아니다. 박 대표가 그동안 보인 상생(相生)의 온건한 정치노선, 부드러운 모성(母性)의 이미지 등이 집권측의 분열적이고 전투적인 리더십에 신물을 느낀 사람들을 그에게로 돌아서게 한 측면이 간과되어선 안 된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박근혜 신드롬’을 ‘박정희의 딸’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렇지만 그 정도로 박 대표가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아버지의 후광’은 박 대표의 정치적 자산이자 부채이다. 아직까지는 자산이 크게 작용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는 부채가 그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자산은 이어받고 부채는 덜어 내는 일은 결국 박 대표의 몫이고, 그에 대한 평가는 국민의 몫이다. 그러고 보면 정치인 박근혜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정권부터 성숙해져야▼
지난주 염창동 당사에서 만난 박 대표에게 필자가 “정치를 왜 하는가?”라고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그는 “국민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러자면 정치지도자부터 사심(私心)을 버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대권에 대한 야망이야 있지 않겠는가.
“뭐, 대통령을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이 말에 무게를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박 대표가 아버지의 시대에 불행했던 많은 이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이해하는 진정성을 보이지 못한다면 ‘박정희의 딸’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이다.
‘박근혜의 딜레마’는 단지 그 부녀만의 문제가 아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 현대사의 그늘을 화해의 열린 마음으로 치유해 낼 수 있느냐는,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시대의 과제이기도 하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러자면 정권부터 성숙해져야 할 텐데 걱정이다.
전진우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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