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17>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7월 29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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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대쪽을 쪼개듯(2)

“용서하시오. 장군. 실은 처음부터 일은 그렇게 되도록 꾸며져 있었소. 잔도(棧道)는 스무 날 만에 다시 고쳐 세울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장군이 이끌고 간 군사들도 동쪽으로 달아날 틈만 살피고 있는 자들로만 골라 뽑은 것이었소.”

한신이 빙긋 웃으며 그렇게 털어놓았다. 번쾌가 얼른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해 물었다.

“그런데 왜 저를….”

“장함의 눈과 귀를 모두 식(蝕) 골짜기로 잡아두기 위함이었소.”

“장함의 눈과 귀라….”

“대왕께서 누구보다 믿고 아끼시는 장군이 잔도 놓는 일을 맡아야만 장함은 우리가 다시 그 잔도를 따라 식 골짜기로 나오려 함을 믿을 것이오. 그러나 그 일을 장함에게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장군이 이끌고 간 군사들이 바로 그들이었소. 그러잖아도 달아날 마음뿐이던 그들은 기한에 몰린 장군이 심하게 다그치면 모두 달아나 장함에게 그 일을 전하리라 보았소. 그런데 이제 일이 그대로 되었으니, 장군은 우리 한군(漢軍)을 위해 큰 공을 세우신 것이나 다름없소.”

그제야 번쾌도 한신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너무 심하게 속은 게 속이 상해 잠시 할말을 잊고 있는데, 한신이 그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는 북으로 가만히 길을 돌아 고도현(古道縣)의 옛길로 나아갈 것이오. 그리하여 진창길로 빠지면 삼진(三秦) 가운데 옹(雍)땅을 바로 들이칠 수 있소. 진창으로 가는 길목에 대산관(大散關)이 있으나 지금쯤 장함의 군사는 모두 식 골짜기 어귀에 몰려 있을 것이니 우리 대군이 불시에 치고 들면 힘들이지 않고 지날 수 있을 것이오. 장군은 얼른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대군의 선봉이 될 채비나 하시오.”

그런 다음 한신은 그날로 한왕을 찾아보고 동쪽으로 돌아갈 대군을 일으키게 했다.

진작부터 채비해온 터라, 한왕이 군사를 내는 일은 조용하면서도 재빠르게 진행되었다. 승상 소하와 약간의 이졸을 파촉(巴蜀) 땅에 남긴 한왕은 6만 군사를 긁어모아 다음날로 남정(南鄭)을 떠났다. 소하를 파촉에 남긴 것은 그곳에서 세금을 거두고 군사로 쓸 장정을 뽑아 동쪽으로 나아가는 한군(漢軍)의 뒤를 대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옹왕(雍王) 장함이라고 해서 매양 손 처매놓고 한왕이 하는 일을 바라보기만 하지는 않았다. 원래가 뛰어난 장수인데다, 항왕과 범증의 당부까지 있어 언제나 파촉 한중의 움직임을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한왕이 비록 잔도를 불살라 돌아올 뜻이 없음을 드러냈지만, 장함은 그게 속임수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넉 달도 안돼 잔도가 있던 식 골짜기가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장함이 사람을 풀어 알아보려 했으나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골짜기 안에서 먼저 한군(漢軍)들이 도망쳐 나와 일러바쳤다.

“한왕이 동쪽으로 돌아오려 합니다. 저희를 보내 잔도를 고치게 하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장함에게는 의심이 남아 있었다. 잔도를 고치는 일을 맡은 장수가 번쾌란 소리를 듣고도 얼른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망쳐 나오는 군사가 점점 늘어가자 장함도 한왕이 다시 식 골짜기로 나오려 한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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