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 22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하루 동안 주고받은 ‘논평 공방’의 키워드 목록들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논평은 “친일부역, 개발독재, 냉전 반공이데올로기, 지역주의, 국가보안법 유지, 남북한 갈등 조장 및 전쟁 공포와 공멸을 지향하는 것이 한나라당이 말하는 국가 정체성이냐”며 ‘과거’를 잔뜩 나열하기도 했다.
올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표심(票心)을 잡기 위해 민생과 경제, 나아가 국가의 미래 비전을 이야기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모습이다.
실제로 지금 국내 정치권의 화두(話頭)는 미래나 비전이 아니다. 오직 ‘수십년 전 일’에 대한 ‘파헤치기’와 이를 통한 정략적 목적이 짙게 깔려 있다. 특히 국정을 책임지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집권세력이 칼날을 세우면서 이런 논쟁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이 2004년 한국의 현주소다.
▽어떤 나라가 성공하는가?=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로 기록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저자인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성공하는 국가의 9가지 습관’을 거론한 적이 있다.
요약하면 ‘몸이 날렵해 변화에 빨리 적응하고, 개방에 적극적이며, 효율성이 떨어지는 조직은 안타깝지만 전체를 위해 과감히 메스를 대고, 국가 브랜드 이미지가 미래지향적인 국가’가 성공한다. 어디에도 ‘과거와의 단절’ ‘자주(自主)’ 등의 말은 없다.
그렇다면 한국은 ‘성공하는 국가의 습관’을 가지고 있을까. 안타깝지만 최근 한국 사회는 갈수록 ‘실패하는 국가’의 모습에 가깝다.
특히 정치권이 그렇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17대 국회 개원 이후 대부분의 노력을 과거 문제에 쏟아 붓고 있다. 친일청산, 유신독재, 정수장학회 등 여야가 사활을 걸고 대결을 펼치는 사안은 모두 ‘과거’와 연결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집권세력의 행태다. 여권은 틈만 나면 이른바 ‘언론개혁’ ‘시장개혁’ 등을 내세우며, ‘개혁 대 반개혁’ ‘적과 아군’ 등 이분법적 사고로 갈등을 키우고 있다. 이러다 보니 사회 전체에 ‘갈등지수’가 커지면서 국민의 스트레스가 높아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확산되고 있다.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도 자주 논쟁에 직접 뛰어들고 있다. ‘유신으로 갈 거냐, 미래로 갈 거냐’ ‘보수는 힘센 사람이 마음대로 하자는 것’이라는 식의 걸러지지 않은 발언과 분열의 리더십은 우리 사회를 한층 더 흔들어 놓고 있다.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김용호(金容浩) 교수는 “최근 과거 역사 문제에까지 정치와 국가가 모두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정치과잉’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며 눈을 미래로 돌릴 것을 주문했다.
▽나라 좀먹는 좌파적 포퓰리즘=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경쟁은 이미 시장경제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특히 최근 들어 좌파적 사고방식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더구나 일부 정권 핵심인사들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킬 의지가 있는지 회의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상 ‘새로운 시도’로 기록될 아파트분양원가 공개나 사학비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재단의 권한을 대폭 줄이는 것을 뼈대로 하는 사립학교법 개정 움직임 등은 시장경제원리와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경제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중앙대 경제학과 홍기택(洪起澤) 교수는 “국제화 개방화 시대에 한국은 우리 마음대로 ‘한국식 시장경제체제’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며 “이처럼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 기업들이 한국에서 투자하고 기업을 일으키는 인센티브가 갈수록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컬럼비아대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는 ‘동아시아의 기적’이라는 저서에서 한국이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정부가 기업인들에게 부여한 인센티브를 꼽은 적이 있다. 지금 많은 기업인들은 현 정부의 정책 기조가 거꾸로 가고 있다고 걱정한다.
▽‘전투적 노동운동’의 그늘=최근 독일 지멘스사(社) 노사는 휴대전화 공장에서 주당 근로시간을 추가 수당 없이 35시간에서 40시간으로 늘리는 데에 합의했다. 회사측이 임금이 훨씬 싼 헝가리로 공장을 옮길 수 있다고 통보하자 노조는 일자리 유지를 위해 근로시간 증가를 선택했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계는 이 같은 흐름을 무시하고 있다. 툭하면 불거지는 일부 고임금 대기업 노조의 파업과 노사관계의 경직성은 더 가난한 노동자의 희생과 젊은 층의 실업 증가로 이어진다.
몇몇 회사 노조는 노사협상에서 아예 공장 해외 이전시 노조협의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외국기업이 한국 투자를 꺼리는 요인의 핵심도 ‘전투적 노동운동’이다.
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들어 8월 12일까지의 노사분규 발생건수는 408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4.5%나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일부 대기업 노조는 이미 약자가 아니다”며 “노사관계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정상화하지 못하면 앞으로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특별취재팀▼
▽팀장=권순활 경제부 차장
▽경제부=공종식 박중현 송진흡
신치영 하임숙 고기정
차지완 박 용기자
▽정치부=윤종구기자
▽사회부=이종훈기자
▽문화부=이승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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