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인가 문예반에 들고 싶어 했던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러지 못한 건 내가 다녔던 중고등학교에서는 문예반조차 성적이 좋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미처 바다에 닿기도 전에 해변에서 조개껍데기에 발을 찔린 수영선수처럼 난감하고 잔뜩 주눅 든 얼굴을 한 채 학창시절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문예반도 아닌 나에게 시를 써보라고 부추긴 사람은 그때 우리 반 국어 과목을 담당하고 있던 선생님이었다.
여름이 막 지나고 9월이 되면 교정은 조용한 술렁거림으로 가득 찼다. 친구들은 한쪽에서 합창 연습을 하고 무용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몇몇은 시를 썼다. 밤새워 쓴 시를 서로 돌려가며 읽기도 하고 신랄하게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시가 뭔지도 몰랐을 텐데, 이상하게 그런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를 쓰고, 더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은 그림으로 그렸다. 서툴지만 한껏 공들인 그 시와 그림을 쓴 패널을 표구하러 광화문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던 기억이 난다.
가을 축제가 시작되면 타교 학생들이 교정으로 막 몰려들었고 그들이 들어서는 입구, 보랏빛 등꽃나무가 발처럼 드리워져 있던 담장에는 우리들이 쓰고 그린 시와 그림이 수줍게 걸려 있었다. 때때로 내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선 사람들의 뒷모습을 나는 내 몸을 다 가리고도 남는 커다란 느티나무 뒤에 숨어 몰래 훔쳐보곤 했다. 저녁이 오면 누군가 내 패널 밑에 놓고 간 쪽지며 꽃 한 송이를 얼굴 붉히며 소중히 품에 안았다. 그래, 한번 가보는 거야. 어떤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그런 말을 해주는 것 같았다. 시화전은 난생 처음으로 내 스스로 뭔가 이루어낸 작은 기적 같은 사건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나는 교정을 떠났다. 이따금 내 시와 그림이 걸려 있던, 생의 어느 한순간 가장 나를 빛나게 하던 햇빛 쏟아지던 그해 가을을 떠올리며 나는 슬그머니 거기로부터 멀어져갔다. 그 후 15년 이 지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만약에 그 돌이 움직이지 않고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면 먼저 주변의 작은 돌부터 움직여봐야 한다’는 지혜를 내 청년시절의 시화전을 통해서 배운 것이다. 어쩌면 그 시절이 내 인생의 가장 순정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그때는 나도 우리도 모두, 별을 노래하는 시인이었으니 말이다.
○조경란씨는?
△1969년생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불란서 안경원’으로 등단 △‘가족의 기원’ 등 장편소설 3권, ‘나의 자줏빛 소파’ 등 작품집 3권과 산문집 ‘조경란의 악어 이야기’ 출간 △현대문학상, 인산 문예창작 펠로십,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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