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 끝에 항왕은 먼저 의제(義帝)에게 늙은 신하 몇과 군사 약간을 붙여 내몰 듯 장사(長沙) 침현(*縣)으로 떠나보냈다. 겉으로는 엄연한 천도(遷都)인 셈이지만, 실은 궁벽하고 외진 곳으로 의제를 유폐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초라한 천도에 분개하는 옛 초나라 신민(臣民)들로 팽성 안이 잠시 수런거렸으나, 워낙 항왕이 눈 부라리며 지켜보는 터라 별 일은 없었다.
은근히 힘들여 의제를 팽성에서 내쫓은 항왕은 다시 한나라를 뒤탈 없게 만드는 일에 손을 댔다. 팽성 안이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한왕(韓王) 성(成)을 가만히 불러들여 말했다.
“과인은 이번에도 장 자방(子房) 선생의 진언을 들어 북으로 제나라를 먼저 정벌하고자 하오. 이왕이면 자방 선생의 꾀를 빌려 전영을 사로잡고자 하는데, 지금 양적(陽翟)에 있으니 이리로 불러들여야겠구려. 자방 선생은 열후(列侯)의 사람이니, 번거롭지만 열후께서 글을 내어 선생을 이리로 불러주시오.”
얼마 전 왕위에서 내좇을 때와 달리 은근하기 짝이 없는 항왕의 목소리에 의아했으나 한왕 성은 시키는 대로 했다. 근신들이 내미는 비단 자락에 장량을 팽성으로 불러들이는 글을 써주었다.
그런데 미처 비단에 먹이 마르기도 전이었다. 근신들이 비단 폭을 거둬들이기 무섭게 항왕이 성난 소리로 외쳤다.
“위사(衛士)들은 어디 있느냐? 당장 저놈을 끌어내 목을 베어라!”
“아니, 대왕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찌하여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 드십니까?”
그제야 놀란 한왕 성이 물었다. 항왕은 불이 뚝뚝 듣는 듯한 눈길로 노려보며 잘라 말했다.
“너는 간사한 장량을 손발로 삼고 줄곧 유방과 내통해 왔다. 저번에는 유방이 파촉 한중에서 나올 뜻이 없다고 속여 과인으로 하여금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삼진을 잃게 하더니, 이제는 또 유방이 결코 관중에서 나올 뜻이 없다는 글로 나를 속이려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대군을 몰고 입관하여 쥐새끼 같은 무리들을 쓸어버리고 싶다만, 당장은 전영이 지척에서 분탕질을 치고 있어 먼저 제나라의 쉬파리 떼부터 흩어버리려고 한다. 그전에 너희를 죽여 무관(武關)의 걱정을 덜려고 하니 죽더라도 까닭이나 알고 죽어라.”
그리고는 변명 한번 들어보는 법 없이 한왕 성을 끌어내 목 베게 했다. 그런 항왕에게는 이전의 그답지 않게 책략적이었으나 실은 그 뒤에 늙은 범증이 있었다.
한왕 성이 피 묻은 목으로만 돌아오자 항왕은 다시 가까이 두고 부리는 신하를 불러 한왕 성이 쓴 글을 주며 말했다.
“너는 이 길로 양적으로 달려가 장량에게 이 글을 주고 그를 팽성으로 불러오너라. 장량이 내 앞에 이를 때까지 결코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서는 아니 된다!”
명을 받은 사자는 그 날로 밤낮을 달려 양적으로 갔다. 먼저 한왕(韓王) 정창에게로 가서 장량이 있는 곳을 알아본 뒤, 다시 장량을 찾아가 한왕 성이 쓴 글을 내주며 말했다.
“열후(列侯)께서 급히 선생을 찾고 계시니 어서 팽성으로 돌아가십시오.”
갑작스레 한왕 성의 글을 받은 장량은 놀라 비단 폭을 펼쳤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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