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동안 없어지지 않는 지독한 ‘종기 치료’를 위해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서울의 모든 종합병원을 순례하셨고, 한 병원에서 실패하실 때마다 어디선가 새로 들은 민간요법을 손수 시술하시기도 했다.
색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 어머니가 ‘시술’하는 동안 겁에 질린 내 시선을 붙잡아 둔 것은 바로 만화였다. ‘도깨비감투’ ‘요철 발명왕’ ‘요괴인간’…. 온 식구들이 내 치료가 원활히 이뤄지도록 닥치는 대로 만화를 들고 들어왔고, 그렇게 만화는 우리 집안에서 자연스럽고 고마운 존재가 되어갔다.
그랬기 때문일까? 만화방이란 날건달이나 코흘리개 아이들이 만화를 보면서 라면과 쥐포를 먹으며 시간을 때우는 곳으로 인식되던 그 시절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식구들의 용인하에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빌려다 보았다.
내가 찾던 만화방은 지하에 있었다. 물청소를 해 본 적이 없는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양쪽 벽으로 올 컬러의 만화 포스터가 네 다섯 겹으로 붙여져 있었다.
포스터에는 언제나 까치머리를 한 남자 주인공과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가득 담은 여주인공이 그려져 있었다. 쇳소리 심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래 묵은 종이 냄새와 라면 끓인 냄새, 주인아주머니 식구들이 생활하는 단칸방의 생활 내음이 뒤섞인 묘한 냄새가 났다.
1980년대를 추억할 수 있는 사랑 고백도 분명 있었다. “이 안에 너 있다”라는 엄청난 파워의 사랑고백이 전국을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애기들’이 들으면 촌스럽다고 피식 웃어버릴지 모르지만, 당시 이현세씨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까치가 엄지에게 했던 고백은 많은 연인들에게 애용됐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만화방을 찾는 습관은 결혼 후까지 이어졌다. 주말엔 남편과 손잡고 만화방을 찾았다. 그렇게 5개월 정도의 신혼시절이 지나면서 급기야 나의 취미가 직업으로 영역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만화스토리 작가가 될 작정을 했던 것이다. 만화스토리를 10년쯤 쓰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다시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시나리오를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이제 음습하던 만화방은 만화대여점 체인으로 탈바꿈했고, 라면 국물 찌든 장부에 까만색 볼펜으로 대여 기록을 정리하던 주인들은 지문 인식기로 고객을 관리한다.
나는 그런 세월의 변화를 경이로움으로 바라보면서 오늘도 그곳을 찾아간다.
●김희재씨는?
△1969년생 △1986년 한양대 연극영화과 입학 △1997년 한양대 연극영화과 대학원, 2002년 추계예대 영상문예대학원 입학 △2004년 추계예대 영상학부 교수 △영화 ‘H’(2002년) ‘국화꽃 향기’(2002년) ‘실미도’(2003년) ‘누구나 비밀은 있다’(2004년) 각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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