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조석원씨(27)는 대학생활 동안 이과계열보다는 문과계열이 더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깨닫고 법학을 복수 전공했다. 졸업 후 인사분야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지원하는 회사마다 주 전공이 물리학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떨어졌다.
조씨는 무작정 대기업에 지원하는 것보다 실무 경험을 쌓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눈높이를 낮춰 종업원 50명 미만의 벤처기업 A사 인사파트에 지원했다. 다행히 A사는 조씨의 직무 열정과 논리적인 감각을 높이 평가해 채용했다.
조씨는 벤처기업에서 성실하게 인사업무를 해 왔고 1년 후 기회가 찾아왔다. 처음에 지원했다가 탈락한 MP3플레이어 제조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것.
그는 “벤처기업에서 경험을 쌓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좋은 직장에 다니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눈높이를 낮춰라=온라인 취업 포털인 스카우트(www.scout.co.kr)가 전국의 대학 4학년생 1144명에게 취업을 원하는 기업의 유형을 물어 본 결과 △대기업 35.4% △공기업 21.4% △외국계 기업 7.3%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현실적으로 취업이 가능한 기업을 묻는 질문에는 77.9%가 중소·벤처기업을 꼽았다.
대학생들은 급여와 복리후생 제도, 직업의 안정성 등을 고려해 대기업 공기업 등의 입사를 원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중소기업밖에 취업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하지만 취업 준비생들의 눈은 여전히 대기업에 맞춰져 있다.
지금처럼 취업난이 심각할 때는 무엇보다 눈높이를 낮춰 중소기업에 취업해 그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취업 전문가들은 말한다. 대학 졸업 후 일자리를 찾지 못해 집과 도서관을 오가며 인터넷에서 대기업의 신입사원 모집공고를 검색하는 것보다는 훨씬 의미 있는 행동이라는 것.
스카우트 김현섭 사장은 “처음 선택한 직장이 최소 2∼3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첫 단추가 중요하다”며 “중소기업은 첫 단추로서 선택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경험은 창업의 밑거름=정보기술(IT) 관련 컨설팅회사인 토트컨설팅 권재휘 사장(33)은 IT 관련 대기업의 사업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업 축소에 따른 인력 구조조정으로 밀려나자 중소기업인 이썸테크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3년 동안 기술영업을 맡았는데 한 분야에서 오래 일을 하다 보니 영업노하우와 고정 고객이 생겼다.
권 사장은 이것을 바탕으로 동료 직원 3명과 함께 작년에 토트컨설팅을 설립했다. 사업이 성과를 내면서 작년에 10명을 채용했으며 올해는 일감이 더 많아져 40명까지 직원을 늘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는 “중소기업에 근무하면서 기술영업뿐만 아니라 회사경영 마케팅 투자자관리(IR) 등 전반적인 분야를 섭렵할 수 있었고 이러한 경험이 경영자 또는 관리자로 나설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대기업에서는 전문화된 일만 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기업 흐름을 읽어 내기가 쉽지 않다. 반면 중소기업에서는 제품 생산과 판매, 운영 등 전체적인 회사 업무를 관장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 기업경영의 전 과정을 쉽게 알 수 있다.
▽중소기업을 거쳐 대기업으로=중소기업에서 자신만의 실력을 쌓고 능력을 발휘하면 대기업으로 옮겨 갈 수 있는 기회가 아주 많다. 대기업은 신입사원보다 실무 경험이 풍부한 경력사원을 선호하기 때문에 일만 잘한다면 중소기업 대기업을 따지지 않고 영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B중소기업에서 반도체장비 관련 해외영업을 담당하던 진모씨(29)는 최근 미국의 대형 반도체 장비회사로 옮겼다.
중소 인터넷기업의 웹개발팀에서 3년 동안 근무했던 김모씨(27·여)도 프로그램 개발 능력을 인정받아 한 달 전 삼성전기의 프로그램 개발팀으로 옮겼다.
중소기업은 임금과 근로조건 면에서 대기업보다 열악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장점도 많다.
무엇보다 능력우선주의로 개개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학벌이나 전공보다는 실무 능력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장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신입사원들에게는 아주 유리하다.
고속 승진이 가능하다는 점도 매력이다. 대기업은 입사 후 과장까지 진급하는 데 평균 7∼8년이 걸리는 데 비해 중소기업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4∼5년이면 가능하다.
직급은 다른 기업으로 옮길 때 하나의 잣대로 활용되기 때문에 연봉 협상 등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스카우트 김 사장은 “취업에 있어 ‘어디서’보다는 ‘언제’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며 “준비돼 있는 사람에게 역전할 수 있는 기회는 언제든 찾아온다”고 말했다.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6개社 거쳐 창업 노형준씨 “中企경험 하나 하나 소중”▼
노형준 사장(34·사진)은 졸업 후 6개의 중소기업을 거쳐 올 4월 ‘무브온’을 창업했다.
무브온은 업체들이 컴퓨터상의 웹사이트뿐 아니라 휴대전화상의 웹사이트를 운영할 수 있도록 유무선 통합 프로그램을 빌려 주는 회사다. 다음 달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전망이다. 정보기술(IT) 벤처기업이 6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은 이례적이다. 노 사장은 “6개의 회사를 거치는 동안 버릴 경험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다.
▽첫 직장=대학 전공은 영어. 졸업하던 1997년 2월, 직원이 30명 정도인 부산의 한 여행사에 취직했다. 동남아, 미주 투어 가이드였다. 고객들을 관찰해 불만과 욕구를 읽는 것이 이후 인터넷 신사업을 발굴하는 감각에 도움이 됐다. 같은 해 12월 퇴사했다.
▽컴퓨터 업계로 진입=1998년은 인터넷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던 시기였다. 새로운 시장 기회를 발굴할 수 있는 영역에서 일하고 싶었다. 부산의 한 컴퓨터 판매회사에 취직했다. 작은 회사라서 영업, 기획, 사무실 청소까지 전방위로 뛰어야 했다. 이때 배운 것은 ‘기획력’. 작은 회사가 시장을 비집고 들어가려면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학교에 컴퓨터 교육을 해주고 납품하는 식을 제안해 매상을 올렸다. 곧 마케팅 실장 직함을 달았다.
▽서울로=서울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진 문자 음악을 동시에 편집하는 소프트웨어(SW)를 만든 회사의 채용공고를 인터넷에서 보고 원서를 냈다. 이 회사는 SW를 만들어 놓고도 마케팅을 못해 개점 휴업 상태였다. 단순한 편집 SW를 메신저용으로 수정하자고 제안했다. 개발자들을 일일이 설득해야 했다. ‘조직 관리’를 배웠다.
▽밀려 드는 스카우트 제의=그 SW를 유명 외국계 업체에 성공적으로 납품하고 나니,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스템 통합, 데이터 압축, 결제 시스템 업체 3곳에 잇달아 스카우트 돼 옮겼다. 무선 인터넷과 관련한 창업 아이템을 현실화하는 데 필요한 영역을 두루 거친 셈이 됐다.
▽후배들에게=경력이나 인맥 관리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어느 분야건 정통한 사람들의 ‘바닥’은 좁기 때문에 2, 3명만 거치면 누가 실력 있는지 바로 안다. 어디에서 시작하든 ‘여기에서 일단 최고로 인정받는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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