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65>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9월 23일 19시 25분


한(漢)2년 2월 한왕 유방은 마침내 진나라의 사직단(社稷壇)을 없애고 한나라의 사직단으로 바꾸어 세웠다. 겉보기에는 승상 소하의 말을 따른 것이지만, 이 또한 천하를 다투려 중원으로 나가기 전에 먼저 해두어야 할 한 제국(帝國)의 바닥 다지기였다.

사(社)는 토지신(土地神) 또는 그 토지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작게는 이정(里亭)에서 크게는 나라에 이르기까지 각기 모시는 신과 사당이 따로 있었다. 직(직)은 피나 메기장을 가리키지만, 신으로는 오곡(五穀)을 모두 관장하는 곡물신(穀物神)의 뜻을 가진다. 또 사(社)처럼 직(직)에도 제단이나 사당의 뜻이 있다.

이 토지신과 곡물신을 모시는 제단이 사직단이다. 마을이나 읍락(邑落)의 사직단에는 사당이 있으나 나라의 사직단에는 사당 대신 특별히 신성하게 여기는 작은 숲과 노천(露天)의 제단이 있을 뿐이다. 숲을 이루는 나무는 그 왕실이 특히 숭상하는 수종(樹種)으로 그 한곳 신이 깃든다고 하는 곳에 흙과 돌로 된 제단이 쌓여졌다. 아마도 뒷날 왕실의 조상신을 모신 종묘(宗廟)와 나란히 있게 되면서 생긴 변화인 듯하다.

이 사직단은 종묘와 더불어 그 나라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뒷날까지도 나라를 곧 사직(社稷)이라 일컫게 되었다. 진나라에도 진영(秦영·처음으로 진나라를 봉읍으로 받은 비자·非子) 이래의 사직단이 있어, 나라는 벌써 2년 전에 망해도 상징으로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런데 이때 한왕이 사직단을 허물어 진나라는 상징조차 없어지고, 그 빈자리를 한(漢)나라가 온전히 대신하게 된다.

그 사이에도 소하는 장정을 모으고 군량을 쌓아 한군의 전력을 증강시켰다. 한신은 군사들을 조련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으며, 장량은 끊임없이 사람을 관동으로 보내 그곳의 형세를 살피게 했다.

그 사이 겨울이 가고 봄도 깊어졌다. 소생하는 봄기운과 더불어 한겨울을 싸움 없이 쉰 한군 진영에도 활기가 넘쳐흘렀다. 그런 어느 날 장량과 한신이 함께 한왕을 찾아왔다.

“대왕, 이제 동쪽으로 밀고 나아갈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항왕은 결국 쉽게 빠져나오기 힘든 수렁에 빠졌습니다.”

그와 같은 장량의 말에 한왕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자방 선생.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한 달 전만 해도 옷깃을 잡고 말리듯 하시던 분이 어찌된 일이오?”

“항왕의 지나친 혈기와 자부가 기어이 일을 낸 듯합니다. 죽은 제왕(齊王) 전영(田榮)을 따르던 세력을 쫓아 멀리 북해(北海)까지 간 그는 모반의 뿌리를 뽑는다면서, 가는 곳마다 성곽을 허물고 해자(垓字)를 메울 뿐만 아니라, 민가까지 모조리 불살라 버렸습니다. 전영을 따르던 군사들은 항복해도 산 채 땅에 묻어 죽였고, 여자와 아이들은 모두 부로(부虜)로 삼아 끌어가니, 제나라 북쪽 땅은 몇 십리를 가도 연기 나는 인가를 보기 어렵다 합니다. 그러자 제나라 사람들은 항복해도 죽고 싸워도 죽을 바에야 원 없이 싸우다 죽겠다며 저마다 들고일어나 지금 산동(山東)은 반란으로 들끓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항왕이라도 당분간은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번에는 한신이 그렇게 차분히 일러주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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