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73>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0월 6일 18시 24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은왕(殷王) 사마앙이 항복했다는 말을 듣자 한왕 유방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제 발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로잡혀 항복해서 그런지 위표(魏豹) 때와는 대접이 달랐다. 사마앙에게서 왕위를 거두고 은(殷) 땅에는 하내군(河內郡)을 설치했다.

한왕은 조가(朝歌)를 하내군의 치소(治所)로 삼고 그곳에서 한동안 대군을 쉬게 했다. 임진나루를 건넌 뒤로 피 튀기는 싸움은 없었으나 그래도 편하게 다리 한번 뻗지 못하고 내달아온 한군(漢軍)이었다. 거기다가 위표의 항복을 받고 사마앙을 사로잡을 동안 따로 험한 일을 맡아 한 장졸들이 적지 않아 그들을 상 주고 다독일 필요도 있었다.

하지만 한군이 조가에서 보름이나 머문 데는 한왕의 타고난 성품 탓이 더 컸다. 임진관에서 하수(河水)를 건넌 지 보름도 안돼 두 왕의 항복을 받고 하동(河東)과 하내의 기름진 들판을 얻게 되자, 한왕은 평소의 느긋함을 넘어 은근히 자만까지 느꼈다. 장졸들을 위로하기보다는 스스로 대견스러워 하면서 잔치와 술을 즐겼다.

그래서 한군이 아래위를 가리지 않고 흥청거리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다시 기쁜 소식이 더해졌다.

“마침내 수무 성이 조참(曺參) 장군께서 이끄는 우리 한군 손에 떨어졌습니다. 조 장군께서는 저희 왕명을 어기고 끝까지 맞서던 위나라 장수와 그를 따르던 군민(軍民)들을 모조리 베어 우리 한나라의 위엄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항복한 군사들과 백성들은 조금도 해치지 않았습니다.”

그 소식이 다시 한왕을 흥겹게 하여 그때까지 애매하던 한군의 진로를 그 자리에서 불쑥 결정하게 했다.

“우리도 이만 수무로 내려가면 어떻겠소? 거기서 며칠 쉬면서 하동을 다독인 뒤에 다시 하남으로 내려가 낙양쯤에 자리 잡으면 좋을 듯하오. 낙양은 관중(關中)에서도 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관외에서 새로 얻은 한(韓)과 하동 하내 하남의 한가운데에 있는 땅이오. 거기서 한번 더 군사를 키우고 싸움에 필요한 물자를 넉넉히 마련하면서 산동의 정세를 살피는 게 어떻겠소? 그러다가 때가 오면 남으로 한(韓)나라를 가로질러 서초(西楚)로 밀고 드는 것이오!”

한왕이 장수들을 모아놓고 천하는 꼼짝없이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는 듯 그렇게 큰소리를 쳤다. 장량이나 한신도 바로 동쪽으로 쳐들어가 패왕 항우와 결판을 낼 엄두는 못 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왕의 허풍처럼 서초로 밀고들 자신은 없었지만, 일단 군사를 하남으로 내자는 데는 뜻을 같이했다.

다른 장수들도 패왕 항우가 버티고 있는 산동으로 밀고 들기보다는 남쪽으로 내려가기를 바라 일은 한왕의 뜻대로 되었다. 한신이 이끄는 한군 본대는 먼저 수무로 옮겨 조참의 군사와 합치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편히 쉰 뒤에 다시 낙양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수무로 옮겨 앉아 한 덩이가 된 한군은 거기서도 조가에서처럼 잔치와 술로 흥청거리며 쉬었다. 그런데 수무에 이른 지 닷새쯤 된 날이었다. 진작부터 한군 진중에서 일하고는 있었으나, 그리 드러나 보이지 않던 위무지(魏無知)란 하급 무관이 한왕을 찾아보고 말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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