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진평에게는 나름대로의 결벽이 있었다. 위왕을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항왕을 떠나면서도 벼슬과 재물로 마뜩찮은 의심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이에 진평은 항왕으로부터 받은 관인(官印)과 상으로 받은 금은을 모두 봉한 뒤에 사람을 시켜 되돌려 주게 하고, 자신은 샛길로 빠져 항왕의 군중(軍中)을 벗어났다.
칼 한 자루만 차고 밤길로만 며칠을 달려 어렵게 산동을 빠져 나온 진평은 마지막으로 한왕 유방을 찾아가 몸을 의탁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수(河水)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한왕이 수무(修武)에 있단 소리를 듣고 백마(白馬) 맞은편에서 물을 건너려 했다.
어떤 한적한 나루에서 배를 찾던 진평은 쫓기는 듯한 마음에 이것저것 살피지 않고 배 한 척을 얻어 탔다. 그런데 전란 시절의 뱃사공이란 게 태반은 수적(水賊)이나 다름없었다. 진평이 배에 오르자 어디서 왔는지 우락부락한 사공 몇이 이런저런 핑계로 같이 배에 올랐다. 진평의 멀쩡한 허우대에다 걸치고 있는 옷이 헤져도 비단이요, 차고 있는 칼도 값싸 보이지 않아 수적을 꾀어 들인 듯했다. 틀림없이 진평이 많은 재물을 몸에 숨기고 있으리라 믿고 강물 한가운데서 재물을 턴 뒤에 죽여 버릴 작정이었다.
배가 강물 가운데로 들어간 뒤에야 그런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진평은 곧 꾀를 냈다. 먼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풀어 나이든 사공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보시오, 사공. 나는 강을 건너면 이 칼이 소용없으니 당신이 받아두시오. 비록 보검은 아니나 여럿이서 술 한 잔 나눠 마실 만한 값은 될 것이오.”
그리고 진평은 옷을 훌훌 벗어 제쳤다. 이어 누가 보아도 그 안에 아무것도 감춰진 것이 없음을 알 수 있게, 벗은 옷을 뱃전에 내던지고 사공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보아하니 일손이 넉넉지 않은 듯하오. 내가 노 젓는 걸 돕겠소.”
뱃사공들이 머쓱해서 말했다.
“노 젓기는 어려서부터 익힌 일이라 우리만으로도 넉넉하오. 어찌했거나 물은 건너게 드릴 테니 손님은 그냥 뱃전에 앉아 계시오.”
그리고는 일없이 백마(白馬)쪽 나루에 내려 주었다. 진평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배에서 내리는데 다시 칼을 받은 늙은 사공이 말했다.
“우리에게는 이 칼이 술 한 잔 나눠 마실 값밖에 안 되지만, 손님에게는 훨씬 요긴하게 쓰일 듯하오. 이 칼도 가지고 가시오.”
이에 진평은 칼까지 되찾아 차고 수무로 올 수 있었다.
위무지(魏無知)가 그처럼 간곡하게 진평을 변호해 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 모든 일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왕도 그런 위무지의 정성을 물리칠 수 없었던지 마지못한 듯 말했다.
“그를 들게 하라.”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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