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85>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0월 20일 18시 29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알았다. 그렇다면 내 이제 그것들을 모조리 사로잡아 산 채로 묻고 그 처자는 또한 모조리 부로로 끌고 갈 것이다. 민가는 모두 불사르고 성은 평지를 만들어 주리라!”

패왕 항우는 그렇게 말하고 그날로 대군을 몰아 곡성(穀城)으로 달려갔다. 하루 낮 하룻밤의 끔찍한 싸움 끝에 곡성은 떨어지고, 싸움에서 1만여명을 죽인 초나라 군사들은 사로잡은 5000명을 다시 산 채로 땅에 묻었다.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을 모두 부로로 삼았으며 성은 태우고 허물어 평지를 만들어 버렸다.

패왕은 그 본보기가 제나라 사람들을 충분히 겁주어 저항의 의지를 꺾어놓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그게 불씨가 된 듯 산동에는 크고 작은 저항의 불길이 잇따라 타올랐다.

제나라 백성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여기저기서 힘대로 맞서니 산동은 곧 패왕에게 고약한 수렁 같은 땅이 되고 말았다. 무턱대고 대군을 쪼갤 수 없어 가까운 곳부터 하나하나 불길을 잡아가는 식으로 대군을 움직이는데, 그게 끝이 없었다. 여기를 비벼 껐다 싶으면 저기서 일고, 거기 가서 끄고 나면 다시 여기서 이는 식이었다.

방금도 패왕은 그 불길을 쫓아 멀리 북해(北海)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구석구석 비로 쓸 듯 산동 북쪽을 휩쓴 뒤에, 마지막으로 임치(臨淄)에 모여 힘을 기르고 있는 전영의 잔당들을 쓸고 나니 벌써 제나라에 온 지 두 달이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지난날 관중에 들 때처럼 이번에도 나는 엉뚱한 곳에서 너무 오래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너무 오래 제나라에 묶여 있고, 팽성에서 너무 멀리 와 있는 게 아닌가….’

지난 두 달 남짓을 돌이켜보다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 패왕이 자신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당장은 오고가는 것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게 다시 한번 패왕의 심기를 상하게 했다. 좋다. 그렇다면 너희 제나라 쥐새끼들, 산동의 쉬파리 떼를 끝까지 뒤쫓아 철저히 짓밟아 주마….

본진으로 돌아간 패왕이 자신의 군막으로 들어가니 언제 왔는지 범증이 어두운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홍문의 잔치 이후 별로 웃는 낯을 본 적이 없어 그의 어두운 얼굴이 오히려 익숙하지만, 그래도 패왕은 건성으로 물어보았다.

“아부(亞父)께서는 무슨 걱정이 있으시오? 어째 얼굴이 밝지 않소.”

그러자 범증이 노여움과 비아냥거림이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홍문에서 관 뚜껑에 못질하다 놓친 그 교활 무쌍(無雙)한 장돌뱅이가 기어이 큰일을 저지르려는가 봅니다. 한왕 유방이 마침내 은왕 사마앙의 항복을 받고 군사를 남으로 돌렸다고 합니다. 지금 평음진(平陰津)으로 내려가고 있다는데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일이라면 그리 걱정 않으셔도 되겠소. 이제 임치에 둥지를 틀고 있던 도적 떼까지 쓸었으니 성양으로 돌아가면 될 것이오. 가서 전가(田假)에게 제나라를 맡기고 우리는 팽성으로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으리다. 오히려 한왕 유방더러 제발 팽성으로 와 달라고 하시오. 그러면 우리는 먼저 가서 편히 쉬며 기다리다가 제 발로 찾아온 그 늙은 도둑을 잡을 수 있을 것이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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