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하철 7호선 종점인 온수역. 객차에서 내려 승강장을 걸어가던 인테리어 디자이너 정원(박신양)은 종점인데도 내리지 않고 객차 안에 나란히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깊이 잠들어 있는 두 여자 아이를 본다. 그러나 사실 그 아이들은 잠든 것이 아니었다. 생활고를 못 이긴 어머니가 독극물을 먹인 뒤 지하철에 두고 내린 것.
그 뒤로 정원은 자신의 신혼집 식탁에 두 소녀가 나타나는 환영에 자꾸 시달린다.
‘4인용 식탁’(2003년 개봉)은 삭막하고 스산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9명이 죽는다. 그 중 4명은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고 2명은 지하철에서, 3명은 달동네에서 죽는다. 서울을 이렇게 소름끼치는 불모의 땅으로 묘사한 영화가 또 있을까.
영화 속의 거의 모든 사건은 아파트단지에서 일어난다. 엔딩 크레디트(Ending Credit·영화가 끝난 뒤 나오는 안내 자막)에 나오는 아파트단지 이름만 모두 8곳. 촬영지 섭외를 맡았던 영화사 ‘봄’의 박종락 제작부장은 “서울에서만 아파트단지 50∼70군데를 돌아다녔다”며 “수도권까지 합하면 100곳이 넘는다”고 말한다.
서울의 아파트란 공간은 사실 귀기(鬼氣)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갑고 깨끗한 공간이다. 똑같이 생긴 직육면체의 건축물들이 죽음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온갖 감상을 다 삼켜 버리고 만다. 그래서 더 무섭다. 한 영화잡지는 이 영화에 ‘체험 삶의 공포’라는 부제를 달기도 했다.
정원은 우연히 만난 여인 연(전지현)도 귀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소통을 시도하지만 결국 연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자기를 도와 달라는 연의 요청을 거절한다. 연은 정원의 아파트로 가 투신자살한다. 뛰어내리기 직전 영화 화면은 온통 아파트로 가득 차 있다.
정원이 집으로 들어가려는 연과 마주치는 장면은 서울 노원구 하계동의 H아파트 205동에서 촬영했다. 이 아파트 입구에는 ‘영화 4인용 식탁 촬영장소-촬영에 협조해 주신 주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금속 푯말이 걸려 있다. 연의 집 내부 촬영을 한 노원구 월계동의 또 다른 H아파트도 이곳에서 멀지 않다.
월계동은 맑은 시냇물에 달이 비치고 중랑천과 우이천으로 둘러싸인 모습이 반달 모양이라 해서, 하계동은 한천(漢川)의 제일 아래쪽에 있는 동네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제 두 동네를 떠올릴 때 사람들은 하천이 아니라 밀집된 아파트를 생각한다.
이 지역에는 1980년대부터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해 1990년대 이후 아파트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섰다.
마지막 장면에서 연이 투신하는 곳은 경기 안양시 갈산동의 샘마을 W아파트다. 사방이 꽉 막힌 느낌이 나는 전망을 가진 장소를 찾는데 굉장히 힘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평촌 신도시 내에 있는 이 아파트단지는 실제론 영화에서의 답답한 느낌과 달리 주변에 산과 공원이 많다.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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