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잎 찬바람에/흩어져 날리면…’으로 시작되는 영화 속 주제가 김정호의 노래 ‘날이 갈수록’이 유행이던 그해 가을 9월28일, 나도 경기 오산역에서 입영열차를 탔다. 학적 변동자로 분류되어 갑작스럽게 영장을 발부받고 불과 2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그 황당하고 당혹스러운 심경이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영화 속 주인공처럼 청바지에 허름한 남방셔츠, 그리고 긴 장발을 늘어뜨린 우리 ‘장정’(입영대상자를 이렇게 불렀다)들이 집결한 곳은 오산역 부근의 한 중학교 운동장이었다. 암울했던 그 시대의 분위기를 상징하듯 군대 가는 내 또래들의 낯빛은 어둡다 못해 비장한 모습이었다고 할까. ‘왠지 모를 슬픔’에 눈물이 나는 것을 참으며 나 역시 아끼던 장발을 운동장 한쪽에서 빡빡 밀어 버렸다. 더욱 슬펐던 것은 머리 깎인 허탈감과 상실감보다도 사귀던 여자친구 M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친구 친지들의 위로와 끊임없는 격려를 받으며 바짝 군기 잡힌 어벙벙한 ‘장정’이 되어 역사까지 행군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내 옆에 없었다.
‘하늘엔 조각구름. 무정한 세월이여/ 꽃잎이 떨어지니 젊음도 곧 가겠지/ 머물 수 없는 시절 우리들의 시절…’
영화 속 주제가처럼 ‘한 때 그리도 빛나던 나의 젊음’은 군기와 규율로 가득 찬 입영열차 속으로 노을 지며 스며들고 있었다. 그때 M이 친구와 함께 나타났다. “서울서 오다가 열차가 연착되었다”는 변명을 헐레벌떡 늘어놓더니, 환한 얼굴로 “잘 가” 하는 것이 아닌가.
나의 착각은 그녀가 영화 속 영자처럼은 아니더라도 필시 펑펑 울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은 것이었다. 그 허전한 마음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영화도, 노래도, 젊음도, 입영열차도, 허전한 것은 도무지 참지 못하던 그런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M은 누구나가 그랬듯이 그해 겨울을 못 넘기고 나를 떠났다.
● 홍사종 사장은?
△1955년 생 △고려대 대학원 경영학과 졸 △극작가 △전 정동극장장. 정동극장 경영으로 보관문화훈장, 지식경영대상 최우수상, 한국관광대상 수상 △숙명여대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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