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93>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0월 29일 18시 32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뒷날 동한(東漢)의 수도가 되는 낙양(洛陽)은 그때 하남군(河南郡)에 속한 현이었다. 진나라 말기 그 낙양현의 남쪽 경계에 새로이 성 하나가 쌓였는데 사람들은 뜻 그대로 신성(新城)이라 불렀다. 수무(修武)에서 푹 쉰 한왕(漢王) 유방이 평음진을 건너 그 신성에 이른 것은 한 2년 3월 중순의 일이었다.

그 사이 불어나 10만이 넘는 대군에 항복받거나 사로잡은 왕 일곱을 거느리고 신성에 이른 한왕은 거기서도 느긋하게 머물러 움직일 줄 몰랐다. 천하 형세를 살핀다는 핑계였지만, 어쩌면 아직도 관외(關外)로 나온 뒤의 잇따른 군사적 성공과 그 전리(戰利)를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매사에 느긋한 한왕도 신성에서는 그리 길게 즐길 팔자가 못되었다.

며칠이나 이어진 술과 잔치에도 시들해진 어느 날 한왕이 장졸 몇과 성 밖을 돌아보고 있는데, 수염 센 늙은이 하나가 길게 읍을 하며 길을 막았다.

“앞에 오시는 분이 한왕이시라면 신이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왕이 틀림없으십니까?”

“그렇소. 그런데 공은 누구시오?”

한왕이 걸음을 멈추고 대답과 더불어 그렇게 묻자 이번에는 그 늙은이가 대답했다.

“신은 이곳 향(鄕=十里가 一亭이요 十亭은 一鄕이 된다)의 삼로(三老)로서 고을 사람들의 교화(敎化)를 맡고 있는 동(董) 아무개입니다.”

“원래가 동공(董公)이셨구려. 그래, 과인에게 들려주실 말씀은 무엇이오?”

그러자 삼로 동공이 옷깃을 여미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길게 말했다.

“신이 듣기로 ‘덕을 따르는 자는 번창하고 덕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順德者昌 逆德者亡)’ 했습니다. 또 ‘명분 없이 군사를 내면 아무 일도 이룰 수가 없다(兵出無名 事故不成)’는 말도 있습니다. 곧 ‘그 역적 됨을 널리 밝힌 뒤라야 비로소 적을 굴복시킬 수가 있는(明其爲賊 敵乃可服)’ 것입니다.

항우는 무도하여 함부로 그 임금인 의제(義帝)를 시해했으니 이는 천하의 역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릇 ‘어짊은 용맹을 부릴 일이 없고, 의로움은 힘을 쓸 일이 없다(仁不以勇 義不以力)’ 하는 바, 대왕께서는 엄숙하게 의제의 장례를 치르신 다음 삼군(三軍)에게 상복을 입히시고 크게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십시오. 그 뒤 다시 천하 제후에게 그 일을 알리고, 그들과 더불어 항우를 치시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 덕을 우러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바로 삼왕(禹王 湯王 文王)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동공에게 말을 시킬 때만 해도 술기운이 얼얼하게 남아 있던 한왕은 거기까지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왕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본능적인 정치 감각이 그 말의 크기와 무게를 알아듣게 한 까닭이었다.

의제가 항우의 명을 받은 구강왕 경포와 형산왕 오예 등의 핍박에 죽은 것은 너덧 달 전의 일이라 한왕도 풍문으로 그 일을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은 있어도, 그 정치적 의미나 자신이 활용할 방도가 얼른 떠오르지 않아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삼로 동공에게 듣고 보니 뭔가 알 듯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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