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蘇 포고문은 장밋빛 일색이었다
소련의 포고문 제1호는 북한 점령을 담당한 극동군 제25군사령관 이반 치스치아코프 이름으로 발표됐다. 당시 좌익계 신문이나 북한의 연감 등에 실린 포고문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대체로 이 포고문이 △조선 해방을 축하하고 조선사람들을 격려한다는 것 △조선사람들이 행복을 창조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것 △조선사람들의 재산을 보호하고 공장과 기업이 정상적으로 활동하도록 원조하겠다는 것 △새로운 여건 아래 조선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 등의 내용을 담았음은 확실하다.
미국의 포고문 제1호는 태평양지역 연합군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이름으로 발표됐다. 이 포고문에 우리 민족에 대한 축하나 격려의 말이 한마디도 없는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남한사람들을 점령지의 피치자 취급하는, 매우 고압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양국의 포고문을 평면적으로 대비하면 남한의 좌익이나 북한의 김일성 말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오늘날 읽어도 소련 포고문은 우리 민족에게 우호적이나 미국 포고문은 비우호적임을 곧바로 느끼게 된다. 왜 그런 차이를 보였을까?
○美 포고문은 발표시점이 다르다
치스치아코프의 포고문이 정확하게 언제 발표됐는지는 오랫동안 확인되지 않았다. 그 전문을 게재한 ‘해방일보’와 ‘북조선연감’ 등이 날짜를 기록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문은 1981년에야 풀렸다. 소련 과학아카데미 산하 동양학연구소가 소련의 공식문서들을 편집해 출판한 자료집 ‘소련-북한의 관계, 1945∼1980’이 그 날짜를 1945년 8월 15일이라고 명기한 것이다. 그보다 25일 늦은 1945년 9월 9일에야 맥아더의 포고문이 발표됐다.
광복 직후 정말 숨 가쁘게 돌아갔던 바로 이 25일 동안 남한과 북한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고려하지 않고 두 포고문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비교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적 진상을 왜곡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치스치아코프가 포고문을 발표했을 당시 소련은 한반도의 해방만 인식하고 있었을 뿐 한반도의 분단현실에 대해서는 몰랐다는 해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소련은 그 시점에 한반도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나뉘고 자신은 경계선 이북만 점령통치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8월 16일 분단합의가 이뤄졌다
몇 가지 사실에 비춰볼 때 이 같은 해석은 상당한 타당성을 갖는다. 첫째, 소련군은 그때 겨우 함경북도의 몇몇 항구들을 점령하고 있었을 뿐이고 38도선까지 진격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다. 둘째, 소련정부가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점령하자는 미국정부의 통고를 받고 동의한 것은 8월 16일이었다. 셋째, 소련 극동군사령부는 8월 24일에야 치스치아코프에게 함흥이나 평양에 점령군사령부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결국 8월 15일까지는 치스치아코프가 1944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성립된 합의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합의란 소련군이 만주의 일본 관동군을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반도 동북지방의 항구들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치스치아코프의 포고문 내용을 분석해 봐도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포고문은 일본 관동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면서 뿌렸던 전단과 마찬가지로 ‘조선 인민’ 전체를 상대로 작성됐다. 포고문의 어느 대목에도 ‘38선’이나 ‘북조선’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 치스치아코프는 우리 민족 전체를 향해 소련군이 조선의 해방자이며 후원자라는 사실을 원론적 입장에서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소련이 먼저 남북단절에 나섰다
맥아더가 포고문을 발표했을 때는 한반도 분단이 확정된 뒤였고, 일본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지 1주일이 지나서였다. 그래서 그는 한반도 전체가 아니라 미국이 점령한 38도선 이남만 대상으로 포고문을 발표했고, 그 포고문은 점령에 필요한 기술적 절차를 중점적으로 담았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그렇다고 해도 그 포고문이 남한사람들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무례하게 작성됐다는 비난은 피할 수 없다).
9월 9일 언저리에 소련정부나 소련점령군이 한반도에 또는 북한에 대해 취한 정책이나 입장을 살펴보면 더욱 공평한 대비가 가능할 것이다. 이 시점에 소련점령군은 자신들이 진주하기 전에 북한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세웠던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들을 소련의 입맛에 맞도록 개편했다. 결코 그대로 승인한 것이 아니었다.
소련군은 우익 민족주의자 조만식이 평양에서 발족시킨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조차 공산주의자들이 들어가 우위를 차지하도록 했고 이름도 소련식으로 고치도록 했다. 또 8월 24일과 26일 사이에 남한과 북한을 잇는 경원선과 경의선 및 토해선(경기 개풍군의 토성과 황해 해주를 잇는 선)을 모두 끊었다. 9월 6일엔 남북한간의 전화와 통신마저 두절시켰다. 남북한의 단절을 먼저 착수하고 완료한 쪽은 바로 소련이었던 것이다.
○소련, 北 행정-경찰-사법권 통제했다
소련점령군은 이어 소련말로 ‘코멘다투라’라고 부르는 ‘경무사령부’를 북한 곳곳에 설치했다. 이 기구는 ‘위수사령부’라고 번역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련군이 행정권 경찰권 사법권을 모두 갖고 북한을 통제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이 기구에서 일했던 한 소련군 고위장교는 훗날 “우리는 이 기구를 통해 우리의 의지를 관철했다, 우리의 의지에 반대되는 일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볼 때 “이제 모든 것은 죄다 조선사람들의 손에 달렸다”고 다짐한 치스치아코프의 포고문은 겉만 번드르르한 선전문건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맥아더의 포고문이 발표된 지 닷새 만인 9월 14일 소련점령군사령부는 북한을 소비에트화해야 한다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본보 10월 11일자 A10면 참조).맥아더의 포고문이 남한을 점령지역으로 다뤘듯이 소련군의 프로그램 역시 북한을 점령지역으로 다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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