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95>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1월 1일 18시 37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한왕의 사자가 이르자, 관동(關東)의 많은 제후와 왕들이 한편으로는 의분에 차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군(漢軍)의 기세에 눌려 분분히 한왕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겉으로는 대왕(代王)이지만 실제로는 조(趙)나라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진여(陳餘)만은 달랐다. 사자가 가져간 글을 읽고난 뒤 무겁게 가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왕의 뜻은 가상하나 역적 장이(張耳)가 그 밑에 있는 한 우리 조나라로서는 한나라를 도울 수가 없소. 만약 장이를 죽여 그 목을 보내준다면 우리도 한왕을 따를 것이오!”

한때는 서로를 위해 목이 잘려도 좋다고 할 만큼 가깝게 지내던[문경지교] 그들이었으나 한번 틀어지니 원수라도 그보다 모진 원수가 없었다. 사자가 돌아와 그런 진여의 말을 전하자 한왕이 막빈들을 불러 모아 놓고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진여가 지난날의 사사로운 감정을 이기지 못해 저렇듯 억지를 부리니 실로 걱정이오. 이대로 두었다가는 항왕에게 붙어 동북(東北)의 우환거리가 될 것인즉 어찌하였으면 좋겠소?”

그러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장이가 나서 결연히 말했다.

“조(趙)나라와 대(代)나라가 제(齊)나라를 평정한 서초(西楚)와 한 덩어리가 되고, 항우의 힘과 사나움에 진여의 꾀와 슬기가 합쳐지면 한나라와 대왕의 앞날은 없어집니다. 대왕께서는 망설이지 마시고 제 목을 쳐서 이 머리를 진여에게 보내십시오. 반드시 진여를 달래 대왕의 한 팔로 삼으셔야만 남쪽으로 내려가 대업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동안 대왕께서 베푸신 은의만으로도 신은 원 없이 눈감을 수 있습니다.”

그 표정이나 어조가 결코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 자리의 어떤 사람에게는 그 길밖에 없는 듯도 보였다. 그때 장량이 일어나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형편은 고약하지만 개 한 마리를 얻자고 호랑이 목을 미끼로 쓸 수는 없지요. 달리 좋은 길이 있을 것이니 상산왕(常山王)께서는 하나뿐인 목을 아끼시지요.”

그래놓고는 가만히 진평을 건너보았다. 미리 짠 듯 진평이 일어나 말했다.

“제게 독한 계책이 있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상산왕의 목을 보존하면서도 진여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계책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한왕이 반갑게 되물었다. 진평이 무엇 때문인지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안됐지만 상산왕을 닮은 사람의 목을 빌려 진여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속여 진여를 한번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놓으면, 나중에 상산왕께서 살아있음을 알게 되더라도 쉽게 항우에게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산왕과 진여는 여러 해를 함께 숨어 지내며 고락을 같이한 사이입니다. 아무려면 진여가 다른 사람의 머리를 보고 속아 넘어가겠습니까?”

듣고 있던 한신이 그렇게 걱정했다. 그러자 진평이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산사람에게 붙은 머리와 잘려진 목에 달린 머리는 다릅니다. 잘려온 머리만 보고 살아있을 때의 그 사람인지 알아보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이번에는 한왕이 가볍게 찌푸린 얼굴로 진평을 보며 물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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