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99>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1월 5일 18시 20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사자가 왔다고? 들라 하라.”

한왕이 그렇게 허락하자 그 군사가 나가 군막 밖에 기다리던 사자를 데려왔다. 한왕이 사자를 살펴보니 어딘지 낯익은 데가 있었다. 사자가 한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거야택(巨野澤)의 팽(彭)장군께서 대왕께 먼저 문후 올리라 하셨습니다. 대왕께서 서쪽으로 관중에 드신 뒤의 자취는 저희도 멀리서나마 눈부셔 하며 우러러 왔습니다.”

그제야 한왕은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이태 전 패공(沛公)으로 창읍(昌邑)을 칠 때 함께 싸운 적이 있는 팽월(彭越)의 수하였다. 일찍이 팽월과 함께 거야택에서 몸을 일으킨 100여 명의 젊은이 가운데 하나로서, 그때는 팽월이 곁에 두고 손발처럼 부려 한왕도 그 얼굴을 익힐 수 있었다.

“나도 팽장군이 지난해 초나라 장수 소공(蕭公) 각(角)과 크게 싸워 이긴 일은 들어 알고 있다. 그래 팽장군은 지금 어디 계시냐?”

“대왕께서 이리로 오신다는 말을 듣고 전군을 들어 마중 나오고 계십니다. 지금 20리 밖에 머물러 있는데, 대왕의 기치 아래 함께 싸우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십니다.”

“과인이 듣기로 팽 장군은 이미 전영(田榮)으로부터 장인(將印)을 받아 제나라의 장수가 되었다 하였는데, 이제 다시 과인의 기치 아래 들겠다니 그 무슨 뜻인가?”

한왕은 내심 반가우면서도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고 그렇게 물었다. 어쩌면 이태 전 외로운 자신 밑에 들기를 마다하고 기어이 무리와 함께 거야택으로 돌아가 버린 팽월에게 느꼈던 서운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자가 그런 한왕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팽월을 대신해 변명하듯 말했다.

“우리 장군님께서도 창읍에서 대왕을 따라 관중으로 들지 않은 일을 못내 후회하셨습니다. 그때 대왕이나 패왕을 따라간 이들은 세력이 크건 작건 저마다 제후나 왕이 되어 속한 곳이 있고 받은 땅이 있습니다만, 우리 장군님은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도 속한 데조차 없는(무소속·無所屬)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외로운 때에 전영이 장인을 보내 대장으로 삼아주니 그 정을 받아들였을 뿐 그의 신하가 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진심으로 대왕을 주군으로 받들고 전군을 들어 한나라의 기치 아래 들고자 하오니 부디 저희들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 말에 한왕은 마음속에 남아 있던 작은 응어리마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바로 좀 전의 호탕한 기분으로 돌아가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이태 만에 팽장군을 다시 보게 되니 고맙고 반가운 나머지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해 보았다. 가서 팽장군께 어서 이리로 오라 이르라. 과인도 군문(軍門)을 나가 팽장군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10리에 뻗친 군문 밖으로 나가 팽월을 맞아들였다. 오래잖아 그곳에 이른 팽월은 무릎 꿇고 군기(軍旗)를 바치며 한왕 밑에서 싸우기를 빌었다. 한왕이 이미 천하를 얻은 양 말했다.

“팽장군은 그간 위(魏)나라의 성 여남은 개를 얻어 그 공은 위나라의 왕이 되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오. 하지만 지금 서위왕(西魏王)인 위표(魏豹)도 죽은 위나라 왕 위구(魏咎)의 종제이니 틀림없이 위 왕실의 자손이라, 장군을 다시 위왕(魏王)으로 세울 수는 없소.”

그리고는 크게 인심 쓰듯 덧붙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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