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00>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1월 7일 18시 06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팽 장군을 위나라 상국(相國)으로 삼고, 거느린 군사는 이제껏 해 온 대로 장군의 뜻에 따라 부릴 수 있게 하겠소. 이제 장군은 거느린 군사와 더불어 양(梁)땅으로 가서 그곳을 경략하도록 하시오. 그 땅을 모두 평정하면 다시 장군을 그곳 왕으로 세울 수도 있을 것이오.”

양도 위나라 땅이니 그런 한왕의 말은 두 위왕(魏王)을 세우거나 언젠가는 팽월로 위표(魏豹)를 갈음하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오래잖아 위표는 한왕을 버리고 패왕에게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데, 어쩌면 위표가 한왕을 배신할 마음은 그때 이미 싹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다시 팽월의 군사 3만이 붙자 한왕이 이끄는 제후군의 세력은 56만으로 늘어났다. 한군이 처음 관중에서 나올 때에 비하면 열배나 부풀어 오른 숫자였다. 하지만 그 엄청난 제후군의 머릿수는 점차 허수(虛數)가 되어갔다.

먼저 한왕의 장수들이 저마다 공을 서둘러 제후군의 알맹이가 되는 한군의 힘을 분산시켰다. 위나라 상국이 된 팽월이 제가 이끌고 온 3만을 데리고 양나라 땅을 평정하러 가자 다른 장수들도 길을 나누어 서초 땅을 평정하자고 나왔다. 지난번 삼진(三秦)을 평정할 때의 방식이었다.

“신에게 군사 한 갈래를 주시면 추현(鄒縣)으로 나가 노(魯)나라의 옛 땅을 거둬들이고 설현(薛縣)과 하구(瑕口)를 공략하여 패왕이 팽성으로 돌아오는 길을 끊겠습니다.”

왕무와 정거를 사로잡아 기세가 오른 번쾌가 한왕을 찾아가 그렇게 청했다. 56만이란 엄청난 허수에 취해버린 한왕이 아무 생각 없이 번쾌의 출병을 허락하고, 인심 좋은 부엌데기 밥 떠주듯 3만 군사를 갈라주었다. 그러자 관영 조참 주발 같은 패현(沛縣)부터의 맹장들이 줄줄이 나섰다.

“소장은 정도(定陶)로 가서 그 부근을 제압한 뒤 창읍(昌邑)과 방여(方與)를 되찾고 거기서 항우가 보낼 구원병을 막아보겠습니다.”

관영이 그렇게 말하며 한 갈래 군사를 원했고, 이어 평소 말이 없는 조참까지도 스스로 나서서 공을 다투었다.

“신도 관 장군과 더불어 정도로 갔다가 남쪽으로 선부(單父)를 거쳐 풍(豊) 패(沛)의 땅을 거둬들이겠습니다. 성양에서 팽성으로 오는 지름길은 그 두 곳을 지나게 되니, 설령 관영을 피해 내려온 초나라의 구원병이 있어도 반드시 신의 그물에 걸려들 것입니다.”

요관을 지키다 늦게 뒤따라온 주발도 질세라 나섰다.

“제게도 한 갈래 군사를 나눠주시면 곡우(曲遇)를 쳐서 떨어뜨린 뒤 유군(遊軍)이 되어 변화에 대응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독립부대가 되어 상대편 영토에서 유격전을 펼쳐보겠다는 뜻이었다.

한왕은 그들의 뜻도 모두 들어주었다. 고향을 같이하는 맹장(猛將)들에게 각기 군사 2만, 3만씩을 나눠주며 원하는 곳에서 싸우게 했다.

한왕이 군권(軍權)을 직접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자라가던 대장군 한신의 불길한 예감이 마비와 같은 무력감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한왕이 무엇에 취한 듯 장수와 군사들을 흩어버리는 것을 보고 한신은 속으로 한탄하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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