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이주선]경영권 방어장치 필요하다

  • 입력 2004년 11월 7일 18시 21분


1997년 말 외환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긴급 자금지원을 받기 위해 정부는 의무공개매수제도의 폐지,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M&A)의 전면 허용, 외국인 투자등록 신고 범위 축소 등 급격한 자본시장 개방을 단행했다. 당시는 이런 개방 조치가 외환위기 탈출을 돕고 기업의 투명성과 경쟁력을 높일 것이라는 주장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큰 폭의 개방이던 당시 조치로 굴지의 우리 기업들이 경영권 방어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됐다. 올 4월 말 현재 국내 주요 9개 그룹의 외국인 지분이 50.8%에 이르면서 기업들은 경영권 방어에 초비상이 걸렸다. 최근 SK㈜ 이사회가 2대 주주 소버린자산운용의 임시주총 소집 요구를 부결시키면서 양측간 경영권 분쟁은 법정 공방으로 번질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1980, 90년대 일본 기업들의 적대적 M&A를 통한 기업 인수를 막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마련했다. 신주를 대량 발행해 배당 형식으로 기존 주주에게 배정하는 독약 처방, 국가 안보를 이유로 M&A를 사후 금지할 수 있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스위스 스웨덴 독일 등도 피라미드 출자, 차등의결권, 상호출자 등 자국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장치를 갖고 있다. 일본은 상호출자와 금융기관에 의한 30% 이상 안정지분 보유로 적대적 M&A를 사실상 원천봉쇄하고 있다.

1998년 이후 많은 우리 기업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갔거나 외국인이 대주주가 됐다. 외국자본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사모펀드 등은 국내 기업 인수 후 유상감자, 고수익 사업의 분할매각 등을 통해 단기 이윤을 추구하며 기업의 장기 성장엔 무관심하다. 이들은 또 고배당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실제 일부 기업은 이런 압력을 의식해 고배당을 하거나 자사주 매입 등을 통한 주가 관리에 치중하고 있다. 결국 경영권 방어 장치가 결여된 우리의 상황이 기업들로 하여금 경영권 유지의 방편으로 재투자보다는 주가 방어에 나서게 하는 것이다. 이는 미래의 성장잠재력을 잠식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적대적 M&A의 위협이 기업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측면도 있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서도 기업 실적 개선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경영권 방어가 불확실한 기업은 안정적으로 투자와 경영을 하기 어려워 결국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 이 점에서 정부가 이번 정기국회에서 입법하려는 방안, 즉 계열 금융보험사의 의결권을 30%에서 15%로 축소하고 공정거래법상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존치하는 것은 우리 기업이 외국자본에 대항해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마저 빼앗는 결과가 될 수 있다.

국내외 자본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5% 공시제도의 운용도 더 철저히 해야 한다. 외국의 투기자본들이 결탁해 지분을 분산 매입할 경우 현 제도로는 공시의무 위반 여부를 알기 어렵다. 나아가 여타 OECD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약 처방 등 경영권 방어 장치의 도입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주선 한국경제연구원 규제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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