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05>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1월 12일 18시 43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유생들이라… 유생들이 무슨 일로?”

한왕이 이맛살부터 찌푸리며 그렇게 받았다. 저잣거리 시절부터 한왕 유방은 유자(儒者)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 실상도 없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사람을 귀찮게 하는 시끄럽고 까다로운 무리―그게 장바닥을 떠돌던 젊은 유방의 머릿속에 박힌 유자의 인상이었다.

패공(沛公)으로 몸을 일으킨 뒤에도 유자들을 보는 눈길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역이기((력,역)食其)처럼 존중하며 쓴 경우도 있었으나, 그때도 유자로서가 아니라 그 책모(策謀)를 높이 사서였을 뿐이었다. 오히려 대개의 경우 유자는 패공의 놀림거리거나 짓궂은 장난의 대상으로, 심할 때는 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의관에 오줌을 누어 욕을 보이기까지 했다.

한왕이 되어 더 많은 유자들을 관리로 거느리게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전해 8월 유자인 주가(周苛)를 어사대부(御使大夫)로 높인 적이 있지만, 그것은 유자로서는 드물게 갖춘 그의 장재(將材) 때문이었다. 또 기신(紀信) 같은 장수는 똑같이 패현부터 한왕을 따라 나서 싸워왔으나 유가의 가르침을 따른다 하여 주발이나 관영보다 한길 낮춰 보았다.

“아마도 성안의 유생들이 대왕께 항복하러 몰려나온 듯합니다.”

한신이 다가오는 유생들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한왕이 어이없다는 듯 빙글거리며 말했다.

“유생들이 무슨 일로 과인에게 항복을 한단 말이오? 내가 언제 그들과 싸우기라도 했단 말이오? 또 그들이 항복을 하면 어떻고, 안하면 어떻다는 것이오? 이제껏 항왕에게 빌붙어 살다가, 일이 글렀다 싶자 과인에게 달려와 아첨으로 말잔치나 벌이려는 것이라면 아예 쫓아버리시오.”

“대왕께서 진정으로 천하를 생각하신다면 그리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때에 따라 유생의 붓은 장수의 칼보다 날카롭고, 그 문장은 병가(兵家)의 법술(法術)보다 더 무서울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 박사(博士)의 복색을 하고 저들에게 에워싸여 오고 있는 저 사람은 대왕께서 천하를 다스리는데 일군(一軍)의 몫은 넉넉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장군께서는 저들을 아시는 듯하구려. 저들이 누구요?”

그제야 한왕이 이상한 듯 정색을 하며 한신에게 물었다. 한신이 아직도 다가오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저들 가운데 에워싸여 오고 있는 것은 진 이세황제 때 박사가 된 숙손통(叔孫通)이고 그를 에워싼 것은 곁에 머물며 시중드는 이만도 100명이 넘는다는 그의 제자들입니다.”

그 말에 한왕도 숙손통을 기억해냈다. 숙손통은 지난날 한왕이 무신군 항량(項梁)의 객장(客將)으로 있을 때 먼빛으로 본 적이 있는 유자였다. 그때 이미 숙손통은 큰 유학자로 항량의 막빈이었으나, 오래잖아 팽성으로 가 회왕(懷王) 밑에 들게 되어 한왕과는 오래 함께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 뒤 한왕이 들은 풍문은 별로 좋지 못했다. 팽성으로 간 숙손통은 송의(宋義)와 손을 잡고 회왕(懷王)의 사람이 되었다가, 송의가 항우에게 죽자 숙손통은 다시 항우 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회왕이 의제가 되어 장사 침현으로 옮겨갈 때도 팽성에 남아 항우를 섬겼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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