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07>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1월 15일 18시 25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대왕께서 진정으로 천하에 뜻을 두고 계시다면 모진 임금과 못된 법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일을 너무 허물해서는 아니 됩니다. 물이 너무 맑으면 사는 물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따져 살피면 따르는 무리가 없는(水淸則無魚 人察則無徒) 법입니다.”

한왕의 속마음을 읽은 것인지 한신이 그렇게 말해 놓고 다시 덧붙였다.

“난세(亂世)를 만나 군진(軍陣)을 벌이고 성을 쳐서 떨어뜨리는 데는 쓸모없을지 모르나, 치세(治世)에 이르러 예의와 법제를 바로잡고 교화(敎化)를 펴는 일은 저기 오는 숙손통 선생을 따를 이가 없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선생을 대함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때 어느새 제자들을 뒤딸리고 다가온 숙손통이 한왕을 알아보고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한왕이 놀란 시늉을 하며 맞절을 한 뒤 숙손통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물었다.

“돌아가신 의제 앞에서 선생을 봬온 이래 벌써 이태가 흘렀구려. 그래, 오늘은 과인에게 무슨 가르침을 내리시려 오셨소?”

그런 한왕의 목소리가 얼마나 은근한지 걱정하던 한신이 오히려 탄복할 지경이었다. 그게 한왕이었다. 모든 일에 태평스럽고 제멋대로였지만, 무슨 말이든 한번 옳게 여겨 받아들이면 얼마든지 커지고 작아질 수 있었으며 굽히고 펼 수 있었다. 숙손통이 여전히 엎드린 채 한왕의 물음에 대답했다.

“이제 팽성에 남은 서초(西楚)의 관리로는 신이 가장 높습니다. 성안 10만 군민의 뜻에 따라 팽성을 대왕께 바치고자 이렇게 나왔습니다.”

“항복은 원래 성을 지키던 장수가 군사들과 더불어 성을 들어 바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선생께서 유생 백여명과 더불어 그 일을 대신하려 하십니까?”

한왕 곁에 있던 장량이 문득 나서 그렇게 물었다. 숙손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난 정월 패왕이 제나라로 떠날 때 팽성은 날랜 군사 5만과 함께 범아부(亞父)께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싸움이 뜻과 같지 않자 패왕은 다시 범아부와 3만군을 불러 가고, 이번에는 계포(季布)가 새로 뽑아 조련도 안 된 군사로 채운 5만으로 팽성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오래잖아 계포마저 2만군을 데리고 군량을 호위하며 제나라로 가자, 팽성을 지키는 일은 패왕의 아재비 항양(項襄)과 노약하여 남겨진 군사 3만에게 맡겨졌습니다.

항양은 그 3만에다 성안 백성들 중에 힘꼴깨나 쓰는 장정 2만을 더 뽑아 성벽 위로 끌어내놓고 어제까지만 해도 팽성을 지키겠다고 큰소리쳐 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침 소성(蕭城)을 지키던 그 조카가 부장 몇 명과 피투성이로 쫓겨오자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성안의 재보(財寶)와 미녀들을 모두 끌어내 수레와 마필에 싣고 제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허겁지겁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성 안에는 이제 장수도 군사도 남아 있지 않아 저희가 이렇게 나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부디 성 안의 10만 생령을 불쌍히 여기시어 한(漢)나라의 신민으로 거두어 주옵소서.”

숙손통뿐만 아니라 그를 따라온 100여명의 유생으로 보아 성 안에 지키는 군사가 없다는 말은 더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패왕 항우의 도읍이 안겨오듯 항복해 오자 한왕은 몹시 기뻤다. 그 기쁨 때문에 숙손통에게 품었던 마뜩찮은 의심까지 깨끗이 털어버린 한왕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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