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의 도읍인 팽성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거기 쌓여있던 재물과 미인까지 차지하게 되자 한왕은 한층 더 자신의 승리를 실감했다. 그러잖아도 잇따른 승리로 자랄 대로 자라 있던 한왕의 호기는 거기서 갑자기 어이없는 착각과 환상으로 바뀌었다. 자신은 이미 항우를 온전히 쳐부수었으며 그리하여 천하에는 오직 자신만 있다는 착각과 환상이었다.
한왕은 천자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재보와 미인들을 제후들과 장수들에게 나눠 주었으며 자신도 그중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전보다 한층 더 풍성하고 흥겨운 잔치로 자신의 승리와 영광을 자축하였다.
그때 한왕이 얼마나 자신만의 환상에 취해있었는가는 관중 역양(轢陽)에 있는 가솔들을 다시 고향인 패현(沛縣)으로 옮겨 오게 한 일로도 짐작이 간다. 팽성을 든 지 뒤 며칠 안돼 한왕은 패현 사람 심이기(審食其)를 불러 말했다.
“경에게 군사 500을 줄 터이니 이제 관중으로 가서 아버님과 어머님을 고향으로 모셔 오도록 하라. 아울러 과인의 가솔들도 함께 옮겨 그 나고 자란 땅에서 편히 살게 하라.”
“패왕의 대군이 아직 제나라에 버티고 있는데 대왕의 가솔들을 산동으로 모셔오는 것은 위태롭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대왕의 가솔들이 고향을 찾는 일은 천하형세가 정해진 뒤라도 늦지 않습니다.”
장량이 그렇게 말렸으나 한왕은 조금도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항우는 이제 근거를 잃고 떠도는 도둑 떼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소. 전횡 같은 어린아이 하나 잡지 못해 몇 달씩 끌려 다닌 터에 다시 우리에게 서초 땅 거의 모두를 뺏겼으니 그를 더 두려워할 게 무엇이오? 거기다가 항우도 말했듯, 부귀해서 고향에 돌아가지 않음은 비단옷 입고 밤길 가는 것과 같다 하였소. 도읍이야 그대로 관중에 둔다 해도, 가솔들까지 고향에 돌아와서 아니 될 일이 무엇이겠소?”
그러면서 심이기를 재촉해 기어이 가솔들을 패현으로 옮겨오게 했다. 장량이나 한신이 보기에는 꼭 무엇에 홀린 사람 같았다.
하기야 한왕이라고 해서 전혀 불길한 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힘에 내몰려 거센 물결 꼭대기에 올라탄 채 취해 지냈지만, 한왕도 가끔씩은 깨어나 중얼거렸다.
‘천하를 얻는 일이 이처럼 어이없고 갑작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왠지 이것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나는 한바탕 늦은 봄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이어지는 제후들과의 질탕한 잔치 자리에서 술과 미인에 취해가다 보면, 패현 저잣거리를 빈털터리로 떠돌 때며 죄를 짓고 탕산(탕山)에 숨어살던 시절이 아련히 떠오르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한바탕 봄꿈이라도 좋다. 여기서 이대로 한 세상 다한들 무엇이 한스러우랴….’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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