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10>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1월 18일 18시 24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제나라에서 전횡을 몰아대던 패왕 항우가 등 뒤로 한군(漢軍)의 압박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한 2년 4월 중순의 일이었다.

“한나라 장수 번쾌가 외황(外黃)에서 동쪽으로 나와 추현(鄒縣) 노현(魯縣)을 치고 설군(薛郡)을 휩쓴 뒤에 지금은 하구(瑕丘)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팽성에서 제나라로 군량과 물자를 나르는 길은 아주 끊기고 맙니다.”

팽성에서 설군을 거쳐 성양에 이르는 양도를 지키고 있던 장수 하나가 빠른 말을 탄 군사를 보내 그렇게 급한 소식을 일러 왔다.

(전에 내가 홍문(鴻門)에서 잘 봐 주었더니, 그 개백정 놈이 감히….)

패왕은 벌컥 화를 내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그때만 해도 그리 깊이 걱정하지는 않았다. 번쾌가 제 용맹만 믿고 홀로 날뛰는 것이라 보았다. 패왕은 곁에 두고 손발처럼 부리는 용저와 위나라 재상 노릇을 하다가 돌아온 족제 항타(項陀)를 불러 말했다.

“너희들은 각기 군사 1만을 이끌고 사수(泗水) 쪽으로 내려가 추로(鄒魯) 부근을 시끄럽게 하는 한왕 유방의 쥐새끼들을 쓸어버려라. 다만 그 대장 번쾌란 자는 제법 용맹이 있으니, 함부로 다루다가 되레 미친개에게 손을 물리는 일이 없게 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군사 3만을 떼어 주는 대신 창읍 쪽으로 내려가 양도를 지키던 종리매를 다시 성양으로 불러들였다.

용저는 지난번 성양 근처에서 전횡에게 당한 수모를 씻을 기회라는 듯 군사들을 휘몰아 남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런데 사흘도 안 돼 다시 패왕에게 기막힌 소식이 날아들었다.

“용저 장군과 항타 장군이 정도(定陶)에서 한나라 장수 관영(灌영)을 만나 크게 싸웠습니다. 첫날은 우리 군사가 우세하였으나 다음 날 한나라 장수 조참(曹參)이 다시 1만 군사로 관영의 뒤를 받쳐 주는 바람에 밀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사수 북쪽으로 물러나 패군을 수습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어지간한 패왕도 멈칫했다. 한군이 번쾌를 옛 노나라 땅에 그대로 두고 다시 두 갈래 군사를 내어 정도로 올라올 수 있었다면 예삿일이 아니었다. 팽성을 노린다는 소문도 거짓이 아닐 듯싶었다. 아무래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라 여겨 패왕이 범증과 계포를 불렀다.

“한왕이 그 군사를 갈라 산동으로까지 보낸 것을 보니 들리는 소문이 반드시 허풍만인 것 같지는 않소. 제나라를 치는 것이 급하지만 등 뒤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듯하오.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패왕이 범증과 계포에게 그렇게 묻고 의논을 시작하는데, 다시 용저가 보낸 군사가 와서 알렸다.

“정도 남쪽에 진채를 내리고 있던 조참과 관영이 탕현(탕縣) 쪽으로 물러났다고 합니다. 용저 장군과 항타 장군은 정도를 다시 회복하셨으나 한군을 뒤쫓지 못하고 대왕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뜻이오? 일껏 싸워 얻은 정도를 내주고 탕현 쪽으로 내려갔다니?”

패왕이 놀란 얼굴로 범증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나 정말 몰라서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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