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그렇다 치고 나이 들어서도 마셨다 하면 필름이 끊기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꽤 많다. 외국에선 알코올중독 취급을 받는 ‘필름 끊김’ 현상이 우리 사회엔 왜 이렇게 만연해 있을까.
혹자는 말한다. 일단 한번 필름이 끊기면 습관이 되어서 어쩔 수 없다고. 결국 잘 설명할 수 없는 인체의 복잡한 메커니즘 때문에 계속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인데 실은 그저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시는 것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는 저서 ‘한국 종교이야기’에서 한국인의 음주 행태와 종교를 연결시킨다. 서구의 술자리가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라면 한국인의 음주는 망아(忘我) 상태를 경험하기 위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망아 상태는 나는 없어지고 술만 남는 경지인데 이는 무속 신앙에서 무당이 굿을 할 때 정신을 잃고 신과 깊은 관계, 즉 하나가 되는 상태를 경험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종교 행위에서 어디 일반 사람들이 이런 경지를 쉽게 경험할 수 있나. 남들보다 필름이 자주 끊기는 주당들은 그만큼 신심이 돈독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하시라.
필름 끊김은 의학적으로는 뇌의 단기 기억장치인 해마와 관련이 있다. 해마는 모양이 바닷물고기인 해마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 술을 많이 마시면 뇌의 해마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 문제가 생긴다.
친구 하나가 베트남에서 오는 길에 정력제로 소문난 ‘해마주’를 구해왔다. 술병에 해마 두 마리와 도마뱀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단다. 물고기 해마와 뇌의 해마의 만남이 궁금해 물어봤다. 오래전 일도 아니고 취할 정도로 마시지도 않았다는데 잘 기억이 안 난다고 발을 뺀다. 해마의 상호작용으로 기억에 문제가 생긴 건지, 아니면 술자리에 친구를 부르지 않은 게 미안해서인지는 분명치 않다.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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