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17>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1월 26일 17시 55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전날까지만 해도 이기기만 해온 번쾌의 군사들이었으나 그 새벽 패왕 항우 앞에서는 뱀 만난 개구리나 진배없었다. 겁먹고 두려움에 질려 패왕에게 맞서기는커녕 도망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패왕과 그를 따르는 초군(楚軍) 선봉은 마비된 듯 굳어 있는 한군을 베고 찌르며 무인지경 가듯 했다.

지난번 홍문(鴻門)에서 살기등등한 패왕에게 맞서 한왕 유방을 구해냈던 천하의 번쾌도 그런 사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번쾌가 가위눌린 사람처럼 어어, 하며 바라보는 사이에 초군 선봉은 한나라 중군을 휩쓸고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부장(部將) 하나가 군막 근처에서 겨우 찾아온 말에 올랐을 때는 이미 한군의 진채가 패왕의 기세에 갈가리 찢긴 뒤였다.

“장군 아니 되겠습니다. 잠시 군사를 물려 패왕의 사나운 칼끝을 피해야겠습니다. 서쪽으로 물러나 군사를 수습한 뒤 다시 싸워보는 게 옳을 듯합니다.”

그래도 마지못해 말배를 박차 달려 나가려는 번쾌를 말을 끌고 온 부장이 말렸다. 번쾌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가다듬어 사방을 돌아보니 그 부장이 한 말이 그르지 않았다. 한군의 군막들은 모두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사졸들은 군대라기보다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려 도살당하는 사냥감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사방을 휩쓸고 다니던 초나라 장수 하나가 번쾌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적장은 어디로 달아나는가? 비겁하게 달아나지 말고 내 칼을 받아라!”

평생 겁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온 번쾌였으나 그날따라 그런 적장의 외침에 간이 철렁했다. 입마저 얼어붙은 듯 대꾸조차 못하고 있는데, 달아나기를 권하던 부장이 창대로 번쾌의 말 엉덩이를 후려치며 말했다.

“장군 먼저 몸을 빼시어 내몰린 군사를 수습하십시오. 뒤는 제가 맡겠습니다.”

“알았다. 선보(單父)로 가서 기다릴 테니 그리로 오너라.”

펄쩍 뛰듯 내닫는 말에 몸을 맡긴 채 번쾌가 그렇게 대답했다. 패신(敗神)에 홀린다는 말이 그런 것이었을까, 그날 무엇에 내몰린 듯 진채를 버리고 달아나던 번쾌가 그 뒤 한 일은 도중에 만난 몇몇 한군 장수들에게 물러나 모일 곳이나 일러준 것이 고작이었다.

대장이 그렇게 달아나자 한군의 패배는 훨씬 더 참담하고 여지없는 것이 되었다. 싸움은 없고 초나라 군사들의 일방적인 살육과 방화와 파괴만이 날이 훤히 샐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호릉에는 달아난 자들을 빼고는 살아있는 한군이 더 남아 있지 않게 되어서야 초군은 창칼을 거두었다.

불타다 남은 한군 장수의 군막에 자리 잡은 패왕은 밤새운 행군과 야습으로 지친 장졸들을 쉬게 하는 한편 뒤따라 이른 시양졸(시養卒)들을 시켜 한군이 남긴 곡식과 고기로 푸짐한 아침밥을 짓게 했다. 미처 그 밥과 국이 끓기도 전에 항양(項襄)이 이끄는 후군이 이르렀다. 모두에게 배불리 아침밥을 먹게 한 뒤에 패왕이 장수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오늘 밤에는 하읍(下邑)을 떨어뜨릴 것이다. 여기서 반나절을 쉬고 하읍으로 달려가 다시 적을 야습한다.”

그러자 항양이 오다가 들은 말을 전했다.

“한왕의 고향인 풍읍과 패현에도 적의 잔병(殘兵)이 있다고 합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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