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18>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1월 28일 18시 04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간밤 우리는 번쾌가 이끈 한군(漢軍)의 주력을 쳐부수어 산산이 흩어놓았다. 풍(豊) 패(沛)에 한왕의 쥐새끼들이 좀 남아있다 해도 그 소문을 전해 들으면 모두 넋이 날고 얼이 흩어져[혼비백산] 달아나 버릴 것이다.”

패왕 항우가 그렇게 장수들을 안심시킨 다음 비로소 사람을 시켜 우(虞)미인을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들였다.

“팽성이 떨어졌단 말을 듣고 너를 걱정하였다. 한왕 유방이 호색(好色)하다 하나, 난군(亂軍)중에 어떻게 너를 가려 거둬들일 수가 있겠느냐?”

패왕이 우미인을 끌어당겨 안으면서 너털웃음으로 그렇게 말하였다. 우미인이 세차게 패왕의 품을 떨치고 나가더니 품안에서 날카로운 비수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늙은 도적의 호색을 입에 담으십니까? 신첩(臣妾) 대왕을 다시 만나 섬길 수 없을 양이면 이 칼로 목을 찔러 세상을 버릴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패왕을 원망스레 올려보는 우 미인의 눈길에는 눈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패왕의 여자가 된 지 이미 한 해 남짓이 되었으나 아직도 그녀에게 패왕은 임금이기보다는 태어난 뒤 첫 정을 나눈 정인(情人)이었다. 우미인이 마음으로 거둬들인 첫 정인이기는 패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눈물과 서릿발 같은 칼날을 보고 패왕도 웃음을 거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칼을 거두어라. 내 우스갯소리가 지나쳤다. 이제부터 다시는 너를 내 곁에서 떼어놓지 않으리라.”

실로 그러했다. 그로부터 채 삼년이 차기 전에 해하(垓下)에서 죽음으로 헤어질 때까지 패왕은 어디를 가든 우미인을 데리고 다녔다.

패왕이 이끈 3만 정병이 호릉을 떠난 것은 그날 오시(午時) 무렵이었다. 세 시진(時辰) 가까이 푹 쉰 초나라 군사들은 점심까지 배불리 먹고 하읍(下邑)으로 길을 잡았다. 그때는 성밖에 머물던 한군이 패왕이 이끈 대군에게 풍비박산난 일과 아울러 초군이 다음에는 하읍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까지 인근에 널리 나 있었다.

그런데 초군이 미처 호릉의 경계를 벗어나기도 전이었다. 패왕이 장수들을 불러 모아 갑자기 길을 바꾸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하읍으로 가지 않고 유현(留縣)으로 간다. 오늘밤 자정 전에 유성(留城)을 떨어뜨린 뒤 거기서 하룻밤을 쉬고 바로 팽성으로 달려갈 것이다. 유성에서 팽성까지는 100리가 못 되니 내일 저물기 전에는 팽성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는 바람같이 군사를 휘몰아 그날 밤으로 비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유성을 차지해버렸다.

그때 하읍에는 한왕 유방의 손위 처남 되는 주여후(周呂侯) 여택(呂澤)이 한 갈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저녁 무렵 호릉에 있던 번쾌의 3만 대군이 짓밟힌 깨강정 꼴이 나고 패왕이 그리로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놀라 성문을 닫아걸고 굳게 지키느라 이웃 성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유성에서 다시 하룻밤을 쉬면서 패왕은 비로소 팽성의 형편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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