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의 말투는 마치 앞으로 있을 싸움의 모든 국면을 이미 장악하고 있는 듯했다. 용저가 그리 용렬한 장수가 아니라 그런 패왕의 말을 금세 알아들었다. 다른 장수들도 용저를 통해 패왕의 뜻을 알아듣고 거기에 맞게 사졸들을 이끌었다.
패왕이 이끈 3만 초군은 유현(留縣)에서 소성까지 내닫듯 달려 날이 샐 무렵 소성 동쪽 20리 되는 곳에 이르렀다. 거기서 패왕은 잠시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마지막으로 싸울 채비를 가다듬게 했다.
“고단하겠지만 방금도 팽성에서 한군에게 갖은 수모와 학대를 당하고 있을 부모형제와 처자를 생각하라. 소성의 적을 두고는 팽성으로 갈 수가 없다. 다시 한번 뒤를 깨끗이 하고 팽성으로 가서 그대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구하도록 하라!”
한 식경이나 쉬었을까, 패왕은 그런 말로 다시 장졸들을 휘몰아 소성으로 달려갔다. 오래잖아 앞서 살피러 간 군사들이 달려와 알렸다.
“소성 동문 밖 벌판에 적이 진세를 벌이고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것은 관영의 진채고 오른 쪽에 있는 것은 조참의 진채라 합니다. 또 성안에는 위왕(魏王) 표(豹)와 몇몇 제후들의 군사가 있고 북쪽 5리쯤 되는 곳에도 제후군 한 갈래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패왕은 곧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나, 우리는 뭉쳐 흩어져 있는 적을 하나씩 친다. 먼저 남쪽에 있는 관영의 진채로부터 짓밟아 조참과 성밖 다른 제후군까지 두들겨 부순다. 한곳에 머물러 싸우지 말고 세찬 물결처럼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쓸어가라. 호릉에서처럼 포로도 잡지 않고 항복도 받지 않는다. 과인이 앞설 터이니 기세로 먼저 적을 제압하고, 창칼이 맞닿거든 되도록 끔찍하고 모질게 적을 몰아 적으로 하여금 싸울 엄두가 나지 않게 하라. 또 우리는 이미 팽성을 떨어뜨리고 그곳 한군을 모조리 쳐부순 것처럼 꾸며라!”
패왕이 그와 같은 명을 내리고 스스로 갑옷 투구를 여몄다. 그리고 관영의 진채가 나타나자 먼저 보검을 빼들고 말을 박찼다.
“과인은 패왕 항적이다. 쥐새끼 같은 반적의 무리는 어서 항복하지 않고 무얼 기다리느냐?”
패왕의 우레 같은 외침에 이어 군사들의 입을 모은 함성이 그 뒤를 받쳤다.
“패왕께서 몸소 나셨다. 너희들은 거록(鉅鹿)의 싸움과 우리 패왕의 무용을 잊었느냐? 이미 팽성은 떨어지고 장돌뱅이 유방은 관중으로 달아났다. 어서 항복하라!”
“팽성에 있던 너희 20만 대군도 모두 항복했다. 너희들도 어서 항복하여 대왕의 자비를 구하고, 신안(新安)의 진나라 군사들처럼 산 채로 흙구덩이에 묻히는 화를 면하라.”
“산동에 있던 너희 한군은 모두 죽었고 번쾌도 머리 없는 귀신이 되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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