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통치는 미국의 구상이었지만…
미국의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은 뿌리가 깊다. 그것이 국제사회에서 공식화된 것은 1943년 3월 27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영국의 이든 외무장관을 만나 종전 후 신탁통치 대상지역으로 한반도를 거론했다. 그에 따라 그해 11월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에 ‘적절한 시기에’라는 단서가 붙었다.
바로 이어 열린 테헤란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한국이 자치능력을 습득할 때까지 후견제를 실시한다는 구상을 밝히고 스탈린의 동의를 얻었다. 1945년 2월 얄타에서 두 사람은 종전 후 한국에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합의했다. 그해 5월 트루먼 미 대통령의 특사로 소련을 방문한 홉킨스가 한국에 대한 4개국의 신탁통치 방침을 전하자 스탈린도 바람직한 구상이라며 화답했다. 미국의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에 소련도 종전 전에 비공식적이지만 세 차례나 긍정적인 의사표시를 한 셈이 된다.
●終戰 전 세 차례나 소련도 동의해
6월 29일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장 주코프와 부국장 자브로딘이 작성한 ‘코리아-짧은 보고서’는 소련의 한반도 구상을 구체화했다. 이 보고서는 ‘동방에서 소련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담보는 소련과 코리아 사이에 우호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확립하는 것으로 이 점이 코리아에 정부를 세우는 데 반영돼야 하며, 코리아에서 신탁통치를 실시하게 되면 소련은 두드러진 역할을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9월 11일부터 영국 런던에서 열린 미영소 3개국 외무장관이사회에 소련대표단은 한국 문제에 대한 제안도 갖고 참가했으나 회의에서 검토되진 않았다. 약 2년간 미소 양국의 군사적 점령을 거쳐 4개국의 신탁통치로 이행하자는 게 소련측 제안이었다. 전현수 경북대 교수(사학)의 논문은 런던 외무장관이사회를 준비할 당시 소련의 한반도 구상이 국제신탁통치로 귀착됐다고 분석했다.
●독자적인 북한 통치 예고한 스탈린
그 시기에 미국도 한반도 구상을 구체화했다. 10월 13일 국무부 전쟁부 해군부 등 3부 조정위원회가 채택해 10월 17일 맥아더에게 전달한 ‘초기 기본지시’는 한국에 대한 미소의 군사점령을 4개국의 신탁통치로 전환시킨다는 구상을 담았다. 그에 근거해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가 10월 20일 미 외교협회 연설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언급했다.
국무장관 번스는 10월 25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분계선을 철폐하려면 미소간에 대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련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0월 24일 주소련 미국대사인 해리먼을 만난 스탈린은 오히려 ‘이제 전승국은 각자가 점령지역을 자기 방침대로 관리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는 소련이 독자적으로 북한을 통치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었다.
●소련은 신탁통치에 흥미를 잃었다
‘코리아에서 우월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소련은 4개국의 신탁통치 구상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소련에 4표 가운데 1표밖에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소련은 코리아가 소련에 우호적인 국가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코리아의 정치체제에서 찾고자 할 것이다. 따라서 소련은 어떤 나라들이 문제를 제기할 때까지 정치적으로 침묵하면서 북한에서는 정치적 통합을 추구하고 남한에서는 정치적 침투에 몰두할 것이다.’
해리먼이 11월 12일 본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가 눈길을 끈다. 요약하면 소련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에 흥미가 없다는 것. 와다 하루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도 해리먼의 분석이 대체로 정확하다고 평가했다. 그 무렵 서울에선 빈센트의 발언에 자극받아 좌우익 모두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북한엔 이미 공산정권이 섰는데…
미군정의 고위간부들도 반탁 여론에 공감을 표시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는 물론이고 국무부 관리로 하지의 고문인 베닝호프와 랭든마저 그랬다. 서울을 방문하고 귀국한 미 전쟁부 차관보 매클로이가 11월 13일 국무장관에게 제출한 보고서 역시 같은 기조. 이 보고서는 소련이 북한을 공산국가로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한마저 그렇게 바꾸려고 하는 듯한 상황에서 미국이 계속 신탁통치 구상에 매달리는 게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같은 날 하지는 남한에 독자적인 군대가 창설돼야 한다고 판단,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시크 육군준장을 임명했다. 결국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11월 20일 랭든은 임시정부 지도자들을 활용해 남한에 ‘통치위원회 같은 것’을 세울 것을 국무부에 제의했다. 랭든의 구상은 중요한 뜻을 갖는다.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식문서로 제기됐다는 점에서다.
●협상에 의한 38도선 해소는 늦었다
랭든은 북한에 공산정권이 세워지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남한에 소련을 봉쇄하기 위한 발판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는 북한 공산정권이 자리를 굳힌 뒤 영향력을 남한으로 확산시킬 가능성에 대비하려면 남한에도 미국의 이념에 맞는 단독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38도선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늦었다는 점도 덧붙였다.
앞서 살펴봤듯이(본보 11월 22일자 A10면) 그때쯤엔 소련 점령군이 북한만을 단위로 하는 당과 행정기관의 조직을 끝내고 단독정권의 기반을 다지던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집된 3국 외무장관회의는 한계가 있었다. 모든 번거로운 결정을 미소 공동위원회에 떠넘긴 3국 외무장관회의에 대해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회의였다’거나 ‘분단 현상을 승인한 것이었지 그것을 타파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학자들의 평가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회의였다
미소 공동위원회 구성은 한국 문제에 대해 미소 양국이 거부권을 갖게 되고, 미소가 합의하지 않는 한 한반도 분단 상황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3국 외무장관회의가 진행 중이던 12월 25일 소련군 총정치국장 슈킨이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에게 제출한 보고서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소련의 냉정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이 보고서는 ‘북한에서 소련 군대를 철수시킬 경우 소련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공고한 정치·경제적 지위를 아직 쟁취하지 못했다’고 썼다.
1946년 1월 1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국이 발행한 ‘공보’에 게재된 ‘일본 항복 후 코리아 상황’이라는 논설은 그때 벌써 한반도 분단을 기정사실화했다. 3국 외무장관회의를 전후해 작성됐을 이 논설은 ‘코리아에 사실상 두 개의 정체(政體)가 정해졌다’고 파악했다. 한반도 상황은 이미 외교적 수단으로 되돌리기 어려운 상태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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