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편찬委 이순구 편사연구사▼
국사편찬위원회 이순구(李順九·45·사진) 편사연구사는 “부계적인 가족제도는 우리의 전통이며 일제는 조선의 관습법을 성문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연구사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공청회에서 ‘호주제는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라는 발표문을 통해 “조선시대 공문서인 호적과 사문서인 족보가 합쳐진 것이 일제강점기의 호주제”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주장은 여성계를 비롯한 호주제 폐지론자들의 견해와 상반된 것이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연구사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유림 측에서 이 연구사의 발표문을 학계의 입장으로 인용하더라”고 귀띔하자 “호주제가 일제의 잔재이기 때문에 폐지돼야 한다는 논리는 전제가 잘못됐기 때문에 명확히 할 필요가 있어 나섰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사는 조선시대가 부계 위주의 가족체계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도 원래 우리의 전통이 쌍계적 친족질서였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그 같은 전통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바뀌었다는 것이다.
“조선은 건국과 함께 성리학을 중심 사상으로 하고 종법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확고하게 부계 중심의 가족제도를 지향했다.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후기에는 잘 정비된 부계적인 가족제도를 갖게 됐다.”
이 연구사는 “그것이 불과 200∼300년 전의 일인데 이를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조선 후기는 사실상 온통 성리학과 부계적인 가족제도로 움직여졌던 사회”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현상은 전면적이었기 때문에 불과 200∼300년 전에 생겼다고 해도 전통은 전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호적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주민등록등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국가가 호적을 만든 것도 세금을 걷기 위한 것이다.
“조선은 엄연히 아들에서 아들로 가계가 이어지는 안정적인 가족 혹은 가문에 의해 그 사회가 잘 유지되기를 바랐다. 그것은 각 집안이 알아서 잘 관리하고 있었다. 부계적인 가족질서는 족보 같은 사문서에 의해 주도됐다.”
이 연구사는 이어 조선시대의 부계적 가족질서가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변화했는지 설명했다.
“일본은 조선을 관리하는 데 조선의 관습법을 무시할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관습법을 꾸준히 성문화하려고 노력했다.”
호적제는 분명히 조선시대의 그것과 달라져 일제강점기에는 강력한 부계적 성격을 띠게 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부계적인 관습법이 호적의 법제화 과정에 덧붙여졌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우리 스스로 근대법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가계 계승 의식을 강력하게 나타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연구사는 끝으로 조선시대의 부계적 가족질서의 역할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호주는 권한보다는 책임이 강조됐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시대 부계적 가족질서는 그 시대를 유지하는 데 유용했다. 안정성이라는 순기능을 무시할 수 없다.”
▼한국고문서학회 이영훈 회장▼
한국고문서학회 회장인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李榮薰·53·사진) 교수는 “호주라는 말은 전통사회 법전에서도, 민간생활 용어에서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의뢰로 작성한 ‘우리나라 전통사회에 호주제가 존재했는가’라는 논문을 통해 “전통사회에서 호주제가 존재했다는 주장은 오늘날과 같은 가족제와 친족제가 아득한 과거에 성립했다는 대중적인, 그러나 근거가 엄밀하지 않은 집단기억에 기초하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또 다른 논문 ‘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과 그 신화성’에서도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쌀을 수탈했고, 정신대를 강제 동원해 일본군 위안부로 삼았다고 기술한 중고교 국사교과서는 신화(神話)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근거를 갖지 않은 이런 집단기억이 민족과 전통의 권위를 빌려 국사라는 이름으로 승화됐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9월 초 TV토론 프로그램에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발언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한 이 교수를 서울대의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이 교수는 효율적인 논쟁을 위해 호주제에 대해 먼저 정의하자고 제의했다.
“호주제는 가족을 대표하는 남성 가장이 재산의 처분이나 가족의 결혼 등에 대해 우월한 권리를 행사하는 제도다. ‘호주’라는 말이 우리 역사에 등장한 것은 고려왕조의 마지막 해인 1391년, 나중에 조선의 태종이 되는 이방원에 의해 호적제도의 개혁이 시도됐을 때다. 호의 대표를 가리켜 ‘호주’라고 했는데 지금의 ‘호주’와는 뜻이 다르다. 요컨대 고려왕조의 가족은 친족집단에서 명확히 분리된 사회적 실체가 아니었다.”
이 교수도 조선왕조가 3년마다 정기적으로 인구를 조사하고 호적을 작성한 사실을 인정한다. ‘호주’ 또는 ‘호수’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지만 어디까지나 왕조에 대한 백성의 농노제적 지위와 부담을 대변한 것이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적 가례가 부계와 종법 원리에 기초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성리학적 가례가 농촌사회 양반가에 보급되는 시기는 17세기 후반부터다. 그 전에는 친족집단에서 남계와 여계가 동등한 비중을 점하는 쌍계적인 형태와 구조였다. 남녀의 상속이 균등했고 제사 역시 돌아가면서 지냈다. 개방적이고 느슨한 친족집단이었다.”
이 교수 역시 18세기 이후 전통사회에 가부장적 가족문화가 성립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계층적으로는 양반신분, 지역적으로 서울 이남에 국한된 부분적 현상이었고 전면적이라고 할 정도의 제도화한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이 교수는 “호주제가 우리의 전통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것”이라고 단언했다.
“일본은 가부장적 가족문화가 발달했고 일본식 가족제도가 바로 호주제다. 일본은 식민지정책에 따라 조선민사령의 개정을 통해 일본민법의 적용범위를 확대해 일본식 호주제를 이식시켜 나갔다. 그러나 당시 법률가들은 조선의 전통문화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 여러 문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김진경 기자 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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