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44>卷五. 밀물과 썰물

  • 입력 2004년 12월 28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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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무얼 기다리느냐? 어서 한왕 유방을 사로잡아라!”

갑자기 패왕이 허물어지고 있는 한나라 중군(中軍)으로 뛰어들며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리로 외쳤다. 그와 함께 한군에는 이제 거세고도 무시무시한 파도처럼 느껴지는 초나라 군사들이 한꺼번에 밀고 들었다. 마지막 용기와 힘을 짜내 그 파도에 맞섰던 한군 장졸들이 한차례 피를 뿜으며 쓰러져 갔다.

그러자 어이없을 만큼 갑작스럽게, 그 어떤 눈사태에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붕괴가 일어났다. 한왕 유방을 에워싸고 펼쳐 있던 5만의 중군이 무너지면서 영벽(靈壁) 동쪽 넓은 벌판에 진채를 벌였던 16만의 한군 모두가 단숨에 패군(敗軍)이 되어 쫓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궤란(潰亂)이었다.

그때껏 진문 쪽에서 어지럽게 흩어지는 좌군과 우군을 어떻게 수습해 보려고 애쓰던 한신도 중군이 무너졌다는 소리를 듣자 다시 팽성에서 느꼈던 이상한 무력감과 절망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이제는 피가 흐르고 살이 튀는 싸움터라 그런지 그 무력감과 절망은 이내 공포를 기조로 하는 심리적 공황상태로 이끌었다.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서쪽으로 달아나야 한다. 그런 다음 뒷날을 도모하자!)

망연하게 싸움판을 바라보던 한신은 한참 뒤에야 겨우 그렇게 머릿속을 가다듬고 자신도 달아나고 있는 한군 장졸들을 뒤쫓았다. 한 식경을 달려 수수(휴水) 가에 이를 때까지는 패군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그 사이 일은 더욱 급박해져 몇 번이고 앞을 가로막는 초나라 군사들을 흩어가며 한신이 수수 가에 이르러보니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넋 나간 듯한 한군들이 떼를 지어 강물과 뒤쫓아 온 초나라 군사들 사이를 오락가락 내닫고 있었다.

“멈춰라. 무슨 일이냐?”

어차피 소용없게 된 말에서 내린 한신이 미친 듯 초나라 군사들 쪽으로 내닫고 있는 사졸 하나를 잡고 물었다.

“앞은 물이 깊어 건널 수가 없습니다. 벌써 물에 빠져 죽은 군사로 강물이 흐르지 않을 지경입니다. 초나라 군사들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빌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넋이 반은 나간 그 사졸이 대장군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때마침 저만치 다가오는 초나라 군사들 쪽으로 달려가더니 마치 도살장의 소처럼 그 들의 창칼을 받고 죽어갔다. 따지고 보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그와 같은 운명이란 생각이 퍼뜩 들며 한신은 비로소 묘한 공황상태에서 깨어났다.

“서라. 나는 대장군 한신이다.”

한신이 칼을 빼들고 이리저리 정신없이 내닫고 있는 한군들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공포와 절망으로 미쳐 있는 그들은 한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듯했다. 참다못한 한신이 그들 가운데 몇을 베고서야 겨우 닫기를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더 물러나봤자 수수의 깊은 물이 있을 뿐이다. 나아가 항복을 해도 죽기는 마찬가지니 차라리 여기서 죽기로 싸워 초군을 물리치고 물을 건널 방도를 찾자!”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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