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론 해변에서 기자에게 지진해일(쓰나미·津波) 피해 지역을 보여 주던 택시운전사 차이 씨(27)는 “빨리 시내 숙소로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왠지 느낌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날도 난데없이 비가 왔거든요.”
지난해 12월 26일 지진해일이 태국 남부를 휩쓸기 바로 전날 밤 비가 왔다는 것. 12월은 태국의 건기(통상 10월∼이듬해 5월)여서 웬만해선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한다.
새해 첫날의 먹구름을 보며 악몽의 재현을 두려워하는 것은 비단 이 운전사만의 반응이 아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입은 깊은 ‘내상(內傷)’은 사람들의 일상 곳곳에서 발견된다. 며칠간 기자가 ‘다시 지진해일이 온다’는 소문이나 경보를 들은 것만도 다섯 차례다.
태국 보건부는 지난해 12월 말 쓰나미 생존자들의 심리 치료를 위해 5000여 명의 정신과 전문의와 심리학자들을 피해 지역으로 급파했다. 특히 피해가 심한 팡아 주에는 2000여 명을 파견했다. 이들 전문 의료진은 최장 2년간 머물 예정이다.
태국 정부 당국자는 “대부분의 생존자들이 가족을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불면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적절한 치료가 이뤄지지 않으면 자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객지에서 지진해일을 경험한 외국인들도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3일 피피 섬에서 만난 미국인 킴벌리 살렙스키 씨는 “함께 왔다가 숨진 친구의 유가족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려고 다시 이곳에 왔지만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 섬을 찾지 않을 것”이라며 몸을 떨었다.
해변 호텔은 손님이 뚝 떨어졌다. 시내 호텔들은 100여 명씩 대기할 정도로 붐비는 반면 파통, 카론, 카타 해변으로 이어지는 해변 호텔은 30∼60%밖에 방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관광산업이 무너질 것을 염려해 3일 파통 해변을 ‘깜짝’ 방문한 탁신 친나왓 태국 총리는 관광객들에게 손을 흔들며 “호텔이 최대한 빨리 복구될 수 있도록 하겠으니 다시 푸껫을 찾아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관광객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푸껫 시내는 점점 한산해지는 모습이다.
휴게실에 수십 장의 매트리스를 깔아 임시 병상을 만들었던 ‘방콕 푸껫 인터내셔널’ 병원도 부상자들이 대부분 퇴원해 외관상 평온을 되찾아 가고 있다. 자원 봉사자들은 3일 모두 철수했고, 현관 안내판에 촘촘히 붙어 있던 실종자 사진도 대부분 사라졌다.
실종자와 사망자를 확인하려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던 푸껫 시청도 지금은 구호품 배급처와 피해접수 센터만 붐빌 뿐이다.
파도는 물러갔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들의 기억 속에 새겨진 악몽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푸껫·카오락=박형준기자lovesong@donga.com
▼“위령제 말고 해줄게 없어…”▼
“딸과 사위의 사진을 놓고 위령제를 여는 것 외에는 달리 딸을 위해 해 줄 일이 없네요….”
태국 팡아 주(州) 카오락에서 신혼여행 도중 실종된 딸을 찾아 지난해 12월 27일 현지에 온 박모 씨는 4일 “일주일간 딸과 사위의 흔적을 찾아다녔지만 허사였다”며 허탈해 했다.
박 씨는 “더 이상 내 손으로 시신을 찾는 게 불가능하고 체재비도 부담스러워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박 씨뿐 아니라 카오락에서 실종된 신혼부부와 예비 신혼부부를 찾아 다녔던 한국인 가족 14명은 이제 귀국할 날짜를 저울질하고 있다. 시신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가족들이 직접 시신을 찾을 방법은 막막하다.
태국 경찰청은 3일 긴급 행정명령을 내려 실종자의 가족, 외국인 자원봉사자, 취재진의 지진해일 피해지역 출입을 금지했다. 시신 훼손을 막고 DNA 채취를 하기 위해서다. 게다가 지난해 12월 30일부터 카오락에서 실종자를 수색해 온 한국 119 구조대원 15명도 카오락에서는 더 이상 실종자를 찾기 힘들다고 보고 3일 오후 끄라비로 이동했다.
주태국 한국대사관은 유품이 현장에서 발견돼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도 시신을 찾지 못한 가족에 한해 ‘사망 신고서’를 발급해 줄 계획이다.
한편 태국 정부는 지진해일 희생자의 DNA 분석작업을 전담할 신원확인센터를 푸껫에 설치키로 했다. 수개월이 걸릴 것으로 보이는 DNA 분석 및 신원 확인 작업 결과는 한국 외교통상부 영사과(02-2100-7580)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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