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의장추대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구원투수는 대개 점수를 벌어놓은 뒤에 하는 건데, 내 경우는 어떻게 점수가 부족할 때 해서 힘든 과정을 가졌다. 팔자려니 한다”고 말했다.
그의 구원투수 경력은 화려하다. 통합민주당이 분당되고 1996년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정계복귀 직후 치러진 15대 총선 때 그는 ‘지역 등권론’을 던져 위기에 빠진 국민회의의 구원에 나섰다.
DJ 집권 후 옷 로비 사건이 절정이었을 때인 1999년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맡았고,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 6월 정책위의장을 다시 맡아 정권말기 뒷수습에 골몰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당의 경선절차와 시기를 정하는 특별대책위 수석부위원장으로 ‘게임의 룰’을 성공적으로 마련했고, 노무현 정부 출범 때는 인수위원장을 맡아 정권 인수의 기틀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정치이력의 대부분을 당내의 ‘재야(在野)’로 일관했다. 그 좋다는 집권당 사무총장도, 원내총무도, 장관직도 해보지 않았다. ‘임시직’을 맡을 때마다 그는 “60에 능참봉일세”라는 말로 겸연쩍어 했다.
이번에도 그는 임기 3개월의 ‘임시직’을 떠맡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떠밀려 무대에 올랐다. 말 많은 열린우리당이지만 모두 그를 원했다. 이치에 안 맞으면 버럭 성을 내 ‘핏대’라는 별명도 얻었지만 뒤끝도, 욕심도 없다. 그의 장기는 ‘직구’. 하지만 ‘커브’도 곧잘 구사한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했지만 그는 결국 ‘대체입법’이라는 현실론을 수용했다. 곧지만 유연한 것이 그의 힘이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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