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교회나 성당, 그리고 법당에서는 자연스럽게 이성을 대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종교적 이유로 나가는 것이지만 사실인즉슨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다.
당시 부모님께 가장 감사했던 것은 두 분이 모두 성당에 다니셨으므로 나도 자연스럽게 성당에 가서 이성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학교에 갈 때는 교복 매무새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주말에 성당에 갈 때에는 바지도 칼날처럼 다리고 머리도 매만지고 어머니 로션도 발라 가면서 엄청나게 몸치장에 신경을 썼다.
미사에만 참여하면 ‘섬싱’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학생회에 가입해서 여학생들과 함께 회합도 하고 봉사활동도 했다. 회합 때는 주로 독서토론이나 성경연구를 했는데 이때가 여학생들에게 자기를 멋있게 드러낼 수 있는 찬스였다.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것은 물론이요, 거울 앞에서 예행연습까지 했다. 성경도 달달 외우고 정말 대단한 열정으로 준비했다. 그러고도 막상 회합이 끝나고 나면, ‘아! 내가 왜 그 순간에 그렇게 말했을까. 더 멋있게 말할 수도 있었는데’, ‘이 단어보다는 저 단어를 쓸 걸’ 하면서 가슴을 치며 후회하곤 했다.
‘작업’의 하이라이트는 여름 캠프였다. 주로 강이나 바다에서 3박4일 정도 진행되는 일정이었는데 이때가 평소 맘에 둔 여학생에게 접근하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일부러 그 여학생 주위를 맴돌며 기회만 있으면 말을 걸고, 며칠 전부터 준비한 웃기는 이야기를 해주며 마음을 사려고 노력했다. 캠프 파이어 시간에는 갈고 닦은 고고 춤을 선보이며 ‘찜’해둔 그 여학생의 눈빛을 확인했다.
종교가 없던 친구들도 성당에 스스로 많이들 찾아왔다. 우리 성당에는 동네 모 여고의 ‘퀸카’가 다녔는데 그 여학생 때문에 성당을 나오기 시작한 남학생들도 많았다. 물론 여학생들도 ‘킹카’ 남학생을 찾아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때 그 시절 우리에게는 성당과 교회가 ‘연애 자유구역’이었다. 청춘의 해방구였던 셈이다. 신부가 되어 독신을 택해 살고 있지만 그때 그 정도의 이성 경험도 없이 신학교에 가서 남정네들과 10년 세월을 보냈다면 무척이나 고리타분하고 멋대가리 없는 사제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 내가 찜했던 그 여학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홍창진 신부
○ 홍창진 신부는…
홍창진 신부(46)는 1989년 사제품을 받고 경기 수원 율전동성당 주임신부로 사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국 유학을 다녀온 뒤 수원 인계동성당 주임신부를 거쳐 현재 과천 별양동성당 주임신부를 맡고 있다. 천주교주교회의 종교간 대화위원회 총무와 장애우 어린이 합창단 ‘에반젤리’의 대표로 활동하는 등 ‘천주교계의 마당발’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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