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56>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1월 12일 18시 03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대왕, 적입니다. 남쪽에서 나타난 적군이 우리를 뒤따라오고 있습니다.”

한왕의 수레가 하읍과 유성(留城) 가운데쯤 왔을 때 뒤에서 호위하며 따라오던 기마 한 기(騎)가 급하게 달려와 알렸다. 한왕이 수레에 서서 돌아보니 동쪽 멀지 않은 곳에서 먼지와 함성이 일고 있었다.

“아직 남은 길이 먼데 벌써 적을 만났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냐? 이는 먼지나 함성으로 미루어 적은 군사 같지도 않구나.”

한왕이 놀란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무리의 기마대가 작은 숲 속에서 뛰어나왔다. 어림으로도 300기는 넘어보였다.

“나타난 것이 기마대니 지친 우리 말과 수레로는 달아날 수조차 없게 되었구나. 아득한 푸른 하늘아, 이렇게 끝을 보려고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는가!”

한왕이 속으로 또 한 번의 이적(異蹟)을 바라며 그렇게 외쳤다. 그때 거기까지 따라온 군사들 중에서 패현(沛縣) 출신의 기사 하나가 수레 앞으로 나서며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대왕께서는 어서 수레를 몰아 서쪽으로 몸을 피하십시오. 신이 모두를 데리고 저들을 막아보겠습니다. 비록 여남은 기밖에 안 되지만 저기 좁은 길목에서 죽기로 막으면 얼마간은 적을 붙들어 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하후영이 바로 채찍을 휘둘러 수레를 몰았다. 그 수레에 실려 떠나면서 한왕이 감격에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내 너희를 기억하마. 꼭 살아서 뒤쫓아 오너라.”

그 사이에도 수레는 달려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나 수레 위의 한왕은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되돌아선 그들 여남은 기는 그대로 한 줄기 돌풍같이 온 길을 되돌아가 산부리와 작은 언덕 때문에 길이 좁아진 곳을 막아섰다. 오래잖아 초나라 기병대의 선두가 그리로 들어서고-그때 하후영이 모는 수레가 산굽이를 돌아 한왕은 그들을 더 볼 수가 없었다.

하후영은 평생의 솜씨를 다 부려 수레를 몰았다. 패현 현청(縣聽) 마구간에서 자라다시피한 어린 날로부터 현령의 어자(御者)로서 현청의 모든 말과 수레를 다스릴 때까지 익힌 기술뿐만이 아니었다. 한왕의 태복이 되어 싸움수레를 몰고 크고 작은 싸움터를 휘저으며 빠르게 내달려온 서너 해도 하후영에게 남다른 기술을 익히게 했다.

그런데 정신없이 수레를 몰고 있는 하후영의 등 뒤에서 갑자기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한 몸같이 느끼는 수레에도 알 수 없는 흔들림이 있었다. 하후영이 돌아보니 한왕이 놀라 뻗대는 공자와 공녀의 팔을 움켜잡고 수레 뒤쪽으로 끌어가고 있었다.

“대왕, 무얼 하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것들 때문에 수레가 늦어진다. 이렇게 달려서야 어떻게 뒤쫓는 적을 떨쳐 버릴 수가 있겠느냐?”

그런 한왕에게서는 아비로서의 자정(慈情)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살기까지 번들거리는 한왕의 두 눈에서는 오직 살아남기 위한 비정한 계산만이 비쳐질 뿐이었다. 그걸 보고 놀란 하후영은 급하게 수레를 세우고 뒤쪽으로 달려갔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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