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간 공조도 탄탄하고 외교적 해결을 통해 북한 핵 문제를 풀어나갈 것이라는 말을 반복해 강조했다.
그러나 익명을 전제로 하거나 사석에서 듣게 되는 이야기는 반대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 싱크탱크 관계자는 행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그들 사이에서는 북한보다 한국과 대화하는 것이 더 까다롭다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전했다.
▽“한국은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다?”=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로스앤젤레스 연설(2004년 11월 13일)과 유럽 순방(12월 1∼7일) 기간 중의 발언은 미 행정부 당국자들의 한국 불신 분위기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를 낳았다.
한 당국자의 전언. “노 대통령의 로스앤젤레스 발언에 대해 강경파인 핵비확산론자들이 즉각적인 불쾌감을 토로했지만 국무부 인사들은 어느 정도 이해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불편한 관계인 프랑스에 가서 미국을 암묵적으로 비난하는 발언을 하자 온건파들까지 불쾌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 당국자는 노 대통령의 유럽 순방 연설문들이 공개된 직후 국무부와 국방부 당국자들 사이에 오간 비공식 e메일 내용을 공개했다. 공식 보고서가 아닌 당국자들끼리 편하게 주고받은 e메일이어서인지 사뭇 격앙된 내용들이었다.
“노 대통령은 앞으로 백악관의 초대를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당국자 1)
“미국을 직접 언급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다면 적어도 그 용기에 탄복이라도 했을 것이다. 미국과 불편한 유럽에서 간접적으로 미국의 대북정책을 비난하는 것은 막대기로 우리 눈을 쿡쿡 찌르는 것과 뭐가 다른가.”(당국자 2)
앨런 롬버그 스팀슨 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노 대통령이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제임스 프리스텁 미 국방대학 교수는 “노 대통령이 칠레 산티아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웃는 얼굴로 돌아서자마자 유럽에서 그런 발언을 한 것은 마치 ‘미국 너희들은 바보다’라고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워싱턴 당국자들은 이미 노 대통령의 로스앤젤레스 국제문제협의회(WAC) 초청 연설 때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물론 미 행정부의 공식적인 반응은 없었다. 미 언론들도 대체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한승주(韓昇洲) 주미대사가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에게 연설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고 켈리 차관보가 “우리도 생각이 같다”고 했다지만 행정부 내부의 기류는 달랐다.
한 행정부 당국자는 “우리는 무대 위에서는 웃지만 커튼 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 당국자는 “한 번이 아니라 연속해서 터져 나오는 노 대통령 연설문의 진의를 파악하고 있는 중”이라고도 했다.
▽할 말은 하는 외교?=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한국의 진보세력에 지지기반을 두고 있는 노 대통령이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한 포석이라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미국에도 물론 있었다.
또 도널드 그레그,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국대사 등으로 구성된 민간 정책조언 그룹인 ‘한반도 태스크포스(the Task Force on the Korean Peninsula)’는 지난해 말 대북 압박정책에 반대한다며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지지하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발언이 부시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둔 시점에서 정작 당사자인 미 행정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로버트 아인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은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무부 핵비확산담당 차관보를 지내 국무부 내부 사정에 정통한 그는 “노 대통령의 유럽 발언이 결국 북한의 입지만 넓혀줬다는 목소리가 많다”면서 “행정부 내 협상파들마저 (한국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한국이 더 이상 미국과 한편이 아니라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는 목소리도 있다”고 전했다.
헤리티지재단의 발비나 황 연구원은 “이런 상황 때문에 워싱턴 정가에서는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반응이 강하다”고 전했다. 한 소식통은 “노 대통령이 나이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정상회담의 적임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데이비드 스타인버그 조지타운대 아시아 연구소장은 “노 정권 또는 노 정권 지지자들이 강조하는 햇볕정책의 기조 자체는 지지한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햇볕정책 자체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기타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하곤 했다”면서 “그 때문에 워싱턴에는 노 정권을 불신하는 기조가 분명 있다”고 전했다.
미국의 외교술에 대한 자조론도 있다.
헤리티지재단의 래리 워츨 부소장은 “상대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자극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면서 “부시 대통령이나 존 볼턴 전 국무부 차관의 발언도 외교적이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워싱턴=김정안기자credo@donga.com
▼“美목표는 北체제변형-비핵화”▼
조지 W 부시 2기 행정부의 핵심 외교참모로 내정된 인사들이 언급한 대북정책 가운데 가장 구체적인 것은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의 발언이다.
지난해 12월 해들리 보좌관 내정자는 “미국이 추구하는 것은 북한의 정권교체(regime change)가 아니라 체제변형(regime transformation)”이라고 말했다고 당시 워싱턴을 방문했던 한국 국회대표단이 전했다.
‘햇볕정책’의 기조와 매우 흡사한 발언이었다. 한미 간 대북 인식의 차이점이 완전히 봉합됐다는 뜻일까.
주한미군 재배치 협상은 물론 세부적인 대북정책 사안까지 깊이 관여해 온 한반도 담당 고위 당국자에게 이 문제부터 물었다. “체제변형이란 무슨 뜻인가.”
그는 이 질문에 “혹시 리더십 변형(leadership transformation)이란 말을 잘못 들은 것 아니냐”라고 되물었다. 체제의 변형은 리더십이 변해야만 가능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또 아직은 행정부 내에서 폭넓게 사용되는 개념이 아닌 듯했다. 잠시 침묵 뒤 그가 말을 이었다.
“해들리 보좌관 내정자가 체제변형을 이야기했다면 아마 진화(evolution)를 암시한 말일 것이다. 체제를 운영하는 사고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체제변형’이란 말은 햇볕정책을 연상시킨다.
“체제변형의 궁극적 목표는 비핵화다. 즉 현 북한 정권이 핵을 포기하는 전략적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반면 햇볕정책은 경제분야(교류를 통한 북한의 개방 유도)에 중점을 둔다. 또한 타임 프레임(시간표)도 다르다. 햇볕정책은 대단한 인내력을 가지고 수십 년 동안 시간을 두고 북한의 변화를 유도해 내는 것이다. 하지만 핵 문제 해결은 시급하다.”
―북한에 대한 압박의 한 방법으로 북한을 제외한 5자회담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다른 고위 당국자가 하던데….
“5자회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관련국들의 동의 여부가 남아 있다. 그들이 회담장에 나올까. 북한은 오히려 ‘좋을 대로 해봐라. 당신들끼리 회담한 뒤 나중에 우리랑 이야기하자’는 식으로 나올 수도 있다.”
―만약 6자회담이 결렬되면 미국의 대북정책은 어떤 방향으로 갈까.
“지난해 6월 3차 회담 때 미국은 상당히 세부적이고 야심 찬 제안을 테이블에 내놨다. 세부적인 내용이 궁금했다면 북한은 상세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라도 9월로 합의한 4차 회담장에 나와야 했다. 그런데 나오지 않았다. 그게 아직도 의문이다. 만약 북한이 회담을 거부하고 협상테이블에 나오지 않으면 해결 방식(approach)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해지고 있다. 어떤 내용의 ‘채찍’이 될 것인지, 그 범위와 내용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물론 외교적 해결을 가장 선호하지만 모든 옵션은 테이블에 있다.”
워싱턴=김정안기자cre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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